일곱 원소 이야기 –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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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셰리 지음, 올리버 색스 서문, 김명남 옮김, 궁리 펴냄

상상해보자. 만에 하나 세상의 모든 지식이 파괴되어 우리가 단 하나의 문장만을 후대에 전할 수 있다면, 어떤 말을 전해야 최대한 많은 정보를 담은 것이 될까? 전설적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은 다음 문장일 것이라고 말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원자로 이뤄져 있다.”

더 상상해보자. 현대 물리학과 화학의 기반인 원자론을 요약한 저 문장에 더불어 우리가 하나의 도표나 그림을 더 전할 수 있다면, 무엇을 고를까? 파인먼도 아닌 내게 누가 그것을 골라 보라고 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만약 누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원소 주기율표를 고를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원자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원자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며 그들의 속성과 관계는 주기율표에 잘 요약되어 있다는 사실, 이 두 가지 사실을 알면, 나머지 지식이 깡그리 파괴된 세상의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현대 과학을 재건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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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 주기율표는 현대 화학의 토대이자 상징이다. 현대 생물학에 DNA 이중나선이 있고 현대 물리학에 원자 구조 모형이 있다면, 화학에는 주기율표가 있다. 주기율표는 1869년 멘델레예프가 당시로서 최선의 형태를 고안하여 과학계의 인정을 받아낸 이래 150년 동안 화학의 굳건한 토대로 기능했다. 그사이 우리의 지식이 원자의 실체조차 확신하지 못하던 수준에서 인위적으로 원자를 쪼개고 합하는 수준까지 팽창했음에도, 주기율표는 결코 기각되지 않고 오히려 범위를 넓혀가며 그 모든 지식을 담아내는 틀이 되었다. 약간 비약해서 말하자면, 지금까지 확인된 118개 원소가 표시된 주기율표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현대 물리학과 화학의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주기율표에서 길어 낼 수 있는 정보는 무궁무진하다.

주기율표에는 어떤 정보가 숨어 있을까. 이를테면 118개 원소들의 원자가 각각 얼마나 큰지, 원자에서 전자 하나를 떼어 내거나 거꾸로 붙이는 데 에너지가 얼마나 드는지, 금속 성질을 얼마나 강하게 띠는지, 화학 결합을 할 때 최대 몇 개까지 하는지, 상온에서 기체일지 고체일지 액체일지, 색깔은 어떨지, 다른 어떤 원소들과 잘 결합할지… 어떤 원소가 세로로 나열된 7개 주기와 가로로 나열된 18개 족이 이루는 격자 속에서 어느 위치에 놓이는가를 알면, 화학자는 위의 성질들을 대충 예측할 수 있다.

이렇듯 원소의 성질에 주기성과 규칙성이 있다는 사실 덕분에 화학은 예측과 계획이 가능한 과학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규칙성이 원자를 구성하는 전자, 양성자, 중성자의 수와 배치 때문에 생긴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점에서 현대 물리학과 화학이 하나로 이어졌다. 여담이지만, 내가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것도 바로 이 주기율표의 매력에 끌려서였다. 학생들은 흔히 화학은 (물리학이나 수학과는 달리) 산만한 정보를 잔뜩 외워야 하는 과학이라고 여기곤 하는데, 화학이 교육되는 방식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 수는 있어도 알고 보면 이것은 이만저만한 착각이 아니다. 전자가 오비탈에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가가 주기율표에서 원소들의 화학적, 물리적 성질을 결정하는 요인이라는 것을 배우는 순간, 그 아름다운 규칙성을 아는 순간, 화학은 더없이 질서 정연한 체계가 되고 주기율표는 더없이 입체적인 보물 창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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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기율표에는 또 다른 측면의 정보도 들어 있다. 원소들이 발견된 과정에 관한 역사적 정보다. 어떤 원소가 어디에서 어떤 기법으로 누구에 의해 발견되었는가 하는 사연에는 현대 화학이 발전해온 과정이 담겨 있다. 그래서인지 화학에 관한 대중서를 쓰는 작가들 중 어지간한 사람은 다 주기율표에 대한 책을 한 권씩은 썼다. 피터 앳킨스도, 필립 볼도, 샘 킨도 썼다. 화학자는 아니지만 여느 화학자보다 더 열렬히 원소를 사랑했던 신경의학자 고 올리버 색스도 빼놓을 수 없다. 색스는 원소 샘플을 수집하는 마니아로도 유명했고, 영미권에서 출간된 주기율표 책에는 거의 모두 추천사를 썼으며(과장이 아니라 내가 읽은 책에서는 다 그랬다), 당연히 이 책에도 서문을 써 주었다. (이 책 5장 마지막을 보면 색스가 저자에게 책의 내용에 관한 정보를 주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색스는 얼마나 애정과 지식이 넘치는 주기율표 마니아였던지!) 이처럼 주기율표는 화학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데도 중요한 기반이다.

그리고 주기율표에 관한 한, [일곱 원소 이야기]의 저자 에릭 R. 셰리를 능가하는 전문가는 또 없다. UCLA 화학과에서 화학사를 가르치는 셰리는 과학철학 중에서도 화학에 초점을 맞춘 학술지를 만들고 이끈 학자이고, 그의 주된 관심사가 주기율표다. 셰리는 많은 논문 외에도 2007년에는 [주기율표 이야기]라는 책을 썼고, 2011년에는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의 ‘아주 짧은 입문서(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 중 한 권인 [주기율표]를 썼다. 그러니까 만약 여러분이 주기율표의 역사와 의미에 관해서 뭔가 알고 싶은 것이 있다면 첫 번째로 찾아갈 만한 사람이 바로 셰리다.

그 셰리가 [일곱 원소 이야기]에서 초점을 맞춘 것은 주기율표에서 우라늄 아래의 92개 원소 중 마지막까지 빈칸으로 남았던 일곱 원소들이다. 셰리가 “하우라늄 원소”라고 부르는 이 원소들은 이른바 초우라늄 원소들과는 좀 다르다. 초우라늄 원소들은 발견 당시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인공적으로 합성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한편 하우라늄 원소들 중에서도 이 책의 주인공인 일곱 원소가 왜 특별한가 하면, 이 원소들은 과학자들이 원소를 원자번호에 따라 배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주기율표에서 정확히 어디어디 빈칸이 남았는지를 확인한 뒤에 남은 이른바 ‘성배’들이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과거와는 달리 분명히 정해진 목표를 놓고 남들보다 먼저 그것을 발견하려고 경쟁했으므로, 이 원소들의 이야기에는 우선권을 둘러싼 분쟁이 두드러진다. 셰리는 그 일화들을 통해 과학적 발견이 객관적으로 쉽게 확인되는 사건일 것이라는 생각은 얼마나 착각인지 알려준다. 원소 발견은 언뜻 “발견하든가 못 하든가 둘 중 하나잖아?” 싶지만 전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 실제 과학 활동에는 늘 정치와 문화가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 무엇이 발견인지 합의하는 과정 자체도 지식 생성의 중요한 일부라는 것, 이런 여러 과학철학적 논제들을 이 원소들을 통해 살펴본다. 앞부분에 간략하게 정리된 주기율표의 역사, 뒷부분에 짧게 언급된 주기율표의 미래도 흥미롭다.

셰리는 책에서 (그가 집필을 마무리했던 2013년) 현재 원소가 118번까지 발견됨으로써 주기율표에 빈칸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고 적었다. 그 사정은 번역본이 출간되는 지금도 그대로이지만, 다만 그사이에 맨 마지막 네 원소가 정식 이름을 갖게 되었다. 113번, 115번, 117번, 118번 원소는 일본, 러시아, 미국의 연구진이 2000년에서 2010년 사이에 합성했다고 진작 발표했으나 그 주장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최근이다. 2016년 11월, IUPAC(국제순수응용화학연맹)은 네 원소에 니호늄(Nh), 모스크븀(Mc), 테네신(Ts), 오가네손(Og)이라는 이름과 기호를 승인했다. 이제 과학자들은 새롭게 8주기를 개시할 119번 원소를 비롯하여 더 큰 원자번호의 원소들도 합성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성과에 따라 주기율표는 앞으로도 더 확장될 테고, 어쩌면 지금과는 형태가 달라질지도 모르며, 전혀 새로운 원소와 물질의 비밀이 드러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학생들은 주기율표에 매료되어 화학을 공부하기 시작할 테고,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화학의 상징은 주기율표일 것이다.

2018년 1월
김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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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스 포드의 양자물리학 강의 –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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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스 W. 포드 지음, 김명남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양자 이론에 대한 과학자들의 발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아인슈타인의 말이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자연의 근본 법칙이 확률적이고 불확실한 것임을 믿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양자 이론을 생각할 때 머리가 아프지 않다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라는 닐스 보어의 말도 인용구로 인기가 좋다. 리처드 파인먼의 말도 빼놓을 수 없다. “세상에 양자 이론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친 김에 몇 개 더 떠올려 본다. “양자 이론은 성공을 거두면 거둘수록 더욱 어처구니없어 보인다.” 아인슈타인의 말이다. “이해가 안 된다고 해서 여러분이 관심을 끊어 버리는 걸 막는 게 내 일입니다. 내게 물리 수업을 받는 학생들도 이해를 못합니다. 나부터 이해하지 못하니까요.” 겸손이 지나친 파인먼의 말이다. “나는 그것[양자역학]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그 발전에 기여했다는 것이 유감이다.” 에르빈 슈뢰딩거의 말이다. 노벨상 수상자 막스 폰 라우에는 심지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물리를 그만두겠다.” 양자 이론 전반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고 드브로이의 물질파 이론에 대해 했다는 말인데 어쨌든 라우에가 정말 물리를 그만두지 않아서 다행이다.

어째 하나같이 양자 이론을 믿지 못하겠노라, 혹은 이해하지 못하겠노라는 말뿐인데, 이 책의 저자도 한 수 거든다. 저자에 따르면 양자 이론은 ‘기괴한 이론’이다. 관측할 수 없는 물리량을 다루고, 자연의 근본 법칙은 확률적이라고 말하고, 입자가 저 혼자 간섭을 일으킨다고 하고, 멀리 떨어진 두 입자가 얽혀 있다고 말하는 등 상식을 거스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더 알 수 없어지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제 손으로 양자 이론을 발전시켰던 과학자들조차 흔쾌히 이론(에 대한 해석)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현재의 과학자들이 이보다 더 깊은 차원의 근본 이론이 존재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다 그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양자 이론은 상대성이론과 함께 현대 물리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결정적 이론이다. 상대성이론이 ‘아주 빠른 것의 세계’에 적용되는 이론이라면, 양자 이론은 ‘아주 작은 것의 세계’에, 구체적으로 말해서 원자의 세계에 적용된다. 원자 속을 탐험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뉴턴의 고전역학을 접고 양자역학을 써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전자를 활용한 전자 기기와 양자 중첩 및 얽힘 현상을 활용한 양자 컴퓨터의 시대를 살고 있으므로, 양자 이론을 여전히 신기하게 느낄 수는 있을지언정 믿지 않을 수는 없다. 아무리 괴상하게 느껴지더라도 양자 이론이 틀림없이 유효한 이론이라는 사실은 여러분과 내가 살아가는 21세기의 세상이 증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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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러니 우리가 양자 이론을 배워볼 이유는 충분하다. 그리고 양자 이론이 그토록 어려운 것이라고 하니, 우리에게는 좋은 선생님이 필요하다. 물론 좋은 선생님도 가지가지다. 농담으로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것이 특기인 선생님이 있는가 하면 요점 정리가 뛰어난 선생님도, 최신 이론에 해박한 선생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의 지은이 케네스 포드는 어떨까?

포드는 한 마디로 정석적인 선생님이다. 다른 대개의 책들은 양자 이론을 그 발전 과정을 따라 연대순으로 서술한다. 보어와 러더퍼드의 원자 모형에서 시작하여 플랑크의 양자, 아인슈타인의 광전 효과, 파울리의 배타원리를 거쳐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 코펜하겐 해석을 나열하는 식이다. 대중 과학서들이 대개 과학사적 접근을 취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쉬운 내용부터 서서히 워밍업하는 편이 덜 부담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다 보면 자칫 지나간 이론들이 현재의 이론보다 더 깊게 머리에 남는다. 이론의 현재적 의미에 상대적으로 소홀하기도 쉽다. 양자 이론을 소개한 책들이 하나같이 비슷해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은 대신 거두절미하고 아원자 입자들을 중심으로 현재의 양자 세계를 묘사한다. 입자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푸는 까닭은 양자 이론은 ‘가장 날랜 것과 가장 작은 것’을 다루는 이론이라서 입자들의 행태에 비추어 볼 때 그 활용과 의미가 쉽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과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양자 세계는 이렇게 생겼다’라고 정면으로 설명해 들어가는 방식이다.

먼저 전자와 중성미자 같은 렙톤들을, 다음으로 쿼크, 힘 운반자들, 양성자나 중성자 같은 합성 입자들을 소개한다(3장, 4장). 그러고서 이들의 행동을 통해 양자 이론의 주요 개념들을 설명한다. ‘양자’란 자연이 알갱이져 있다는 뜻이라는 것(5장), 양자 세계는 확률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6장), 입자들의 특이한 성질 때문에 이 세상에 물리와 화학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7장), 입자들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몇 가지 보존법칙이라는 것(8장), 입자가 곧 파동이라는 역설을 이해하는 방법(9장)을 말한다. 표준 모형이 아우르는 입자 물리학의 현재를 제시하고, 그 세계관이라 할 수 있는 양자 이론의 역할을 강조하는 셈이다.

이 책은 학생들의 수준을 얕잡아 보지 않는다. 좀 어려운 부분이라고 해서 그냥 외우라고 하는 일이 없다.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일도 없다. 파인먼 도표(4장)나 TCP 대칭(8장)에 대한 설명을 보면 알 수 있다. 복습 문제까지 딸린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지은이의 목표는 독자가 ‘양자 이론이 뭔지 대충 알 것도 같아’ 하는 막연한 기분과 만족감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양자 이론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교과서에 가까운 책이기는 해도, 양자 이론의 역사적 내러티브와 철학적 의미를 짚어보는 일도 잊지는 않는다. 왜 과학자들은 양자 이론이 확률적 이론이라는 사실에 괴로워할까? 파울리의 배타원리가 왜 ‘물리학 전체를 통틀어 가장 경이로운 연결 고리’일까? 자연의 대칭성은 어째서 당연한 일이 아니라 깜짝 놀랄 만한 속성일까? 이런 질문들을 통해서 우리도 과학자들이 양자 이론에 대해 품는 경이로운 감정을 몸소 느껴 볼 수 있다. 왜 양자 이론이 기괴한 이론인지, 왜 존 휠러 같은 위대한 과학자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니, 남은 시간은 양자에 대해 생각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을 정도로 양자가 과학자들을 사로잡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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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번역본 초판은 2008년 출간되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십 년 동안 물리학이 이룬 발전 중 이 책에 첨가해야 할 것을 꼽자면, 2008년 가을 가동되기 시작한 유럽 입자물리 연구소(CERN)의 거대 강입자 가속기(LHC)가 2012년 힉스 입자로 추정되는 입자를 확인함으로써 이제 입자 물리학의 표준 모형이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문제점을 여럿 품고는 있지만) 큰 틀에서 실험적으로 확인된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몇 가지 세부적인 점을 제외하고는, 이 책은 딱히 고칠 데 없이 여전히 좋은 양자 이론 교과서다. 과학책을 적잖이 번역해온 나는 간혹 친구들로부터 이런저런 과학적 주제로 괜찮은 책을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데, 그때 양자 이론을 알려주는 책은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아쉬워 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물론 20세기 원자론과 양자역학의 발전 과정을 역사적으로 서술한 책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초끈 이론 등을 소개하기 위해서 필수 단계로 양자 이론을 소개한 책도 많다. 그러나 오히려 양자 이론의 내용만을 교과서처럼 소개한 책은 퍽 드물다. 상대성이론과 비교해보면 더 그렇다. 그 사정은 지난 십 년 동안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니, 케네스 포드 교수의 이 정석적인 양자 이론 책은 여전히 요긴한 안내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2018년 1월
김명남

Why Children’s Book Should Be a Little Sad – Kate DiCamillo

트위터에서 친애하는 분들이 알려준 글을 번역해보았다. 동화 작가 케이트 디카밀로가 쓴 글로 2018년 1월 12일 [타임]에 실렸다. [타임]이 이 글에 단 제목은 ‘왜 동화는 약간 슬퍼야 하는가’다. 원문은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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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맷,

나는 당신의 책 [사랑]을 읽었어요. 그리고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내가 책장을 넘겨 피아노 밑에 숨은 아이를 보았을 때 – 작고, 걱정하고, 무서워하는 아이를 – 꼭 내 존재가 인정받은 듯한 느낌이 밀려들었다는 사실을. 꼭 누가 나를 봐준 것 같았다는 사실을. 내가 바로 그렇게 실제로 (또한 은유적으로) 피아노 밑에 숨던 아이였죠. 나는 우리 가족의 비밀과 두려움 때문에 고립된 기분을 느끼는 아이였어요. 내가 아이였을 때 그 그림을 보았다면 엄청나게 안도했을 거예요. 내가 혼자가 아니란 걸 알았을 거예요. 덜 창피하게 느끼게 되었을 거예요.

당신은 내게 물었죠. 우리 동화 작가들은 우리 독자들에게 얼마나 솔직해야 하느냐고. 우리가 할 일은 아이들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이들의 순수함을 지켜주는 것인지.

8952709535_f나도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아이들이 가득한 강당에서 “이 가운데 [샬롯의 거미줄]을 알고 좋아하는 친구가 있나요” 하고 물어본 적 있나요? 내 경험으로는, 거의 모든 아이들이 손을 들어요. 그다음에 “읽고 울었던 친구가 있나요” 하고 물어보면, 번쩍 들었던 손들이 대부분 여전히 번쩍 들려 있어요.

내가 어릴 때 제일 친했던 친구는 [샬롯의 거미줄]을 읽고 또 읽었죠. 마지막 쪽까지 읽자마자 책을 뒤집어 처음부터 다시 읽었어요.  몇 년 전 나는 그 친구에게 그때 왜 그랬느냐고 물어보았죠.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던 이유가 뭐야?” 나는 물었어요. “다시 읽으면 결말이 다르게 나올 수 있을 거라고, 더 좋은 결말이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샬롯이 죽지 않을 거라고?”

“아냐.” 친구는 대답했어요. “그런 게 아니었어. 내가 읽고 또 읽었던 건 결말이 다르게 나오기를 바라서가 아니었고, 결말이 다르게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도 아니었어. 결말이 다르게 나오지 않으리란 걸 똑똑히 알기 때문이었어. 나는 결국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그게 어떻게든 괜찮아진다는 것도 알았어.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다시 읽어보면, 모든 것이 너무나 아름다웠어. 그리고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다는 걸 확인했지. 그게 바로 그 책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였어. 그게 바로 내가 들어야 했던 이야기였어. 내가 어떻게든 그것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니 내가 생각하기에, 당신과 나를 비롯하여 어린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신성한 일을 해보려고 애쓰는 모든 작가가 답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에요. 우리는 어떻게 진실을 말하되 그 진실을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낼까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나는 어떻게 내가 작가가 되었는가 하는 사연을 들려줘요. 어릴 때 내가 어떤 아이였는지 말해주고,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우리 아빠가 가족을 떠났다는 것도 말해줘요. 4년 전 사우스다코타에 갔을 때였어요. 거대한 강당을 메운 900명의 아이들 앞에서 여느 때 하는 이야기를 들려줬죠. 내가 어릴 때 만날 아팠다는 이야기, 우리 아빠가 우리를 떠났다는 이야기. 그다음에는 내가 글을 쓰고 싶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어요. 끈기 있게 계속 해보았다는 것도 말해주었어요.

질의응답 시간에 한 남자아이가 내게 물었어요. 만약 내가 만날 아픈 아이가 아니었고 아빠가 나를 떠나지 않았더라도 작가가 되었을 것 같으냐고요. 나는 “만약 내가 그런 일들을 겪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일은 없었을 가능성이 꽤 높았을 것 같군요” 하는 식으로 대답했죠. 그러자 한 여자아이가 손을 들고 말했어요. “알고 보니까 선생님은 선생님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했던 거네요.”

아이들이 강당을 빠져나갈 때, 나는 문간에 서서 지나가는 아이들과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았어요. 그때 한 남자아이가 – 호리호리한 다리에 금발 머리카락의 아이였어요 – 내 손을 잡으면서 말했어요. “나는 여기 사우스다코타에 있고 우리 아빠는 캘리포니아에 있어요.” 아이는 반대쪽 손을 들어 캘리포니아 방향을 가리켰죠. “아빠는 거기 있고 나는 엄마랑 같이 여기 있어요. 그래서 나는 내가 괜찮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오늘 선생님은 선생님이 괜찮다고 말했잖아요. 그래서 이제 나는 나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요?

울지 않으려고 애썼죠. 아이의 손을 계속 잡고 있었죠.

아이와 눈을 마주쳤어요.

그리고 말했어요. “너는 괜찮을 거야. 너는 괜찮아. 아까 다른 아이가 말했잖아.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해.”

나는 그 아이와 깊이 연결된 기분이었어요.

누군가 나를 봐주었구나 하는 기분을, 우리 둘 다 느꼈다고 생각해요.

내가 [샬롯의 거미줄]에서 제일 좋아하는 부분, 읽을 때마다 울게 되는 부분은 끝 쪽에 나와요. 이런 대사죠. “이 가을날들은 점점 더 짧아지고 추워지겠지. 나뭇잎들은 나뭇가지에서 헐거워지다가 땅으로 떨어지겠지. 크리스마스가 올 테고, 그다음엔 눈 덮인 겨울이 올 거야. 너는 살아서 꽁꽁 언 세상의 아름다움을 즐길 거야. 넌 주커만 아저씨에게 중요한 존재이고, 아저씨는 널 결코 해치지 않을 테니까. 겨울도 지나갈 테고, 낮이 길어질 테고, 풀밭에 고인 물이 녹을 거야. 멧종다리가 돌아와서 노래할 테고, 개구리들이 깨어날 테고, 다시 따스한 바람이 불어올 거야. 그 모든 장면과 소리와 냄새를 너는 즐길 거야, 윌버. 이 사랑스러운 세상을, 이 소중한 나날을…”

나는 E. B. 화이트가 어떻게 그 일을 해냈는지를, 그러니까 어떻게 진실을 말하면서도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냈는지를, 그 비결을 오랫동안 고민해왔답니다.

그리고 내 생각에 당신이라면, 사랑에 대해 그렇게 아름다운 책을 쓴 당신이라면, 결국 내가 생각해낼 수 있었던 해답은 사랑뿐이었다고 말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 같군요. E. B. 화이트는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기에, 세상에 관한 진실을 말했죠. 그 슬픔을, 애통함을, 가슴 미어지게 만드는 아름다움을. 그는 자신의 독자들을 충분히 믿었기에 그들에게 진실을 말했고, 그 진실과 더불어 위안이, 또한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왔던 겁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독자들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보는 것, 또한 남들도 우리를 보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담아,

케이트.

***

KD3케이트 디카밀로의 번역된 책들은 여기.

케이트 디카밀로의 홈페이지는 여기.

케이트가 맷이라고 부른 사람은 역시 뉴베리 상을 받은 동화 작가로, [사랑]이란 책은 여기.

옆의 사진은 어린 시절의 케이트 디카밀로라고 한다. 홈페이지에서 보고 너무 좋아서 가져왔다.

2017년 올해의,

2009년 올해의,
2010년 올해의,
2011년 올해의,
2012년 올해의,
2013년 올해의,
2014년 올해의,
2015년 올해의,
2016년 올해의,

올해의 일하다 – 9권
올해의 번역가 – 장호연 ([시선들], [시모어 번스타인의 말], [콜럼바인])

올해의 만나다 – 리베카 솔닛
올해의 기억하다 – 탄핵, 마중물샘
올해의 여행 – 제주

올해의 탐정 – 마르틴 베크
올해의 게임 – 모뉴먼트 밸리 2
올해의 만화 – [펀 홈], [바닷마을 다이어리 8]
올해의 읽다 –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Infinite Jest]

올해의 책 – [랩 걸], [다윈 영의 악의 기원] (후자는 작년 출간이지만)
올해의 듣다 – 타이터스 웰리버가 읽어주는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 오디오북
올해의 영화 – ‘맨체스터 바이 더 씨’,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올해의 꽃 – 튤립과 작약

올해의 공간 – 집
올해의 걷다 – 삼청공원
올해의 먹다 – 안국동 별궁식당 청국장
올해의 커피 – 망원동 스몰커피
올해의 술집 – 서촌 영업을 마감하던 바르셀로나

올해의 못하다 – 1월, 3월, 6월에 각 2주 정도 바닥으로 가라앉아 힘들었다
올해의 잘하다 – 필라테스를 계속 다니다, 금주하다

올해의 사건 – 비밀
올해의 물건 – 비밀
올해의 사람 – 비밀
올해의 나 – 자신이 없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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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탐정

: ‘올해의’ 시리즈를 쓰기 시작한 2009년에도 ‘올해의 탐정’이 마르틴 베크였다. 그때부터 읽고 옮겼던 것. 올해 드디어 시리즈 열 권 중 네 권을 3월, 11월에 두 권씩 냈다. 내후년까지 나머지 여섯 권을 마저 번역할 계획. 이걸 마무리하기 전에는 죽을 수도 없으니 (절대 안 되지) 잘 살아 보려고 한다.

올해의 읽다

: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산문집을 번역하면서 소설도 읽었다. [Infinite Jest]는 2년에 걸쳐 올해 다 읽었다. 괜히 혼자 켕겨서 덧붙이자면 ‘눈으로 활자는 다 읽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 그래도 다 읽었다.

올해의 꽃

: 봄에 작약을 선물 받았다. 그런데 누가 보내 주신 것인지 아직 모른다. 당시는 제대로 추측했다고 생각했으나 틀렸음. 보내 주신 분이 이 사실을 이제야 알면 화나시겠지만. 오히려 그래서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꽃이 되었는지도. 그래서 말인데 제게 고백하고 싶은 분은 언제든 이름을 밝히고 해 주세요. 후후후. 신년에는 저도 더 좋은 결과 기대합니다…

튤립들도 아주 예뻤다. 우리 집에 어울리는 꽃 같다.

올해의 나

: 몸도 마음도 (예상보다, 기대보다) 자주 아팠다. 아마 햇빛을 너무 적게 쐰 것이 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연말 건강 검진에서 비정상적으로 낮은 혈중 비타민D 수치와 뼈엉성증에 가까운 낮은 뼈밀도가 확인되었으니 농담으로 하는 말만은 아니다. 나여, 내년엔 부디 잘 부탁해. 하루하루 늙어 가고 있어서 어렵겠지만 남에게 사랑 받을 궁리를 하기 전에 스스로를 좀 더 좋아하려고, 다독여 주려고 노력해 봐.

The Best American Science and Nature Writing 2000-2017

호턴미플린하트코트(HMH) 출판사가 2000년부터 매년 내는 ‘The Best American Science and Nature Writing’ 시리즈가 있다. 그 해에 미국 잡지에 실렸던 과학/자연 기사 중 좋았던 것을 100편쯤 출판사가 선정한 뒤, 매년 달라지는 초빙 편집자가 그중 20~25편쯤을 골라서 책으로 엮는 것. (HMH의 ‘Best American Series’는 단편소설, 에세이 등 다른 분야도 많고 과학/자연 편은 비교적 최근에 생긴 것이다. 과학/자연 편 전체를 보려면 여기.)

9781328715517_lres2017년 올해의 책도 진작 나왔는데, 초빙 편집자가 [랩 걸]의 저자 호프 자런이 아닌가! 난 이 시리즈를 한 권도 읽지는 않았다. 그래도 매년 올해는 누가 초빙 편집자가 되었고 어떤 작가들이 포함되었는지는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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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빙 편집자를 유심히 보게 된 것은 최근 몇 년 동안 계속해서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딴소리지만, 영국왕립학회가 주는 과학책 상에서 눈에 띌 정도로 여성 수상자가 안 나오는 것 때문에 몇 년 전 퍽 심각한 논쟁도 있고 그랬는데(그래 봐야 여기 관심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사이의 찻잔 속 태풍이었지만), 어쩌면 HMH는 그런 세태까지 염두에 두어 최근 일부러 여성 작가를 초빙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2014년 초빙 편집자는 데버러 블룸(퓰리처를 받은 과학 저널리스트로 번역본은 애착 이론의 해리 할로 이야기인 [사랑의 발견], [CSI IN 모던타임스]가 있다), 2015년은 레베카 스클루트(과학 저널리스트로, 미국에서 초베스트셀러가 된 [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이 번역되었었다), 2016년은 에이미 스튜어트(식물학이 전문인 저널리스트로 번역본 중 [술 취한 식물학자]가 말하자면 대표작 격인데, 최근 소설에 도전해서 성공했고 그 소설도 [여자는 총을 들고 기다린다]로 번역되었다)였고 이제 2017년은 호프 자런이니 4년 연속 여성 작가가 초빙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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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올해 목차를 들여다보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2000년부터 2017년까지 18년 동안 이 선집에 가장 자주 이름을 올린 작가는 누구일까? 초빙 편집자의 취향에 따라 매년 좀더 집중하는 분야가 있기도 하고 그러니 이 선집이 무슨 객관적인 평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 누가 동료 과학 저널리스트들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는 작가인지는 알 수 있지 않을까?

쓸데없는 목록 작성을 너무 좋아하는 나는, 그래서, 18권의 책 목차를 목록화해보았다…

그 결과 확인한 것: 18년 동안 실린 글은 총 455편이다. 글이 한 편이라도 실린 작가는 총 340명이다.

가장 많은 글을 올린 작가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름 뒤의 *표는 번역본이 한 권이라도 있는 작가. 각종 매체에 기사를 쓰는 것이 업인 사람들이 많아서 애초에 단행본은 별로 없는 경우도 많다.)

총 3회:
칼 짐머(Carl Zimmer) – 생물학 *
찰스 C. 만(Charles C. Mann) – 지구과학, 자연
데이비드 돕스(David Hobbs) – 생물학, 의학
에드워드 호글랜드(Edward Hoagland) – 자연, 동물
존 E. 호건(John E. Horgan) – 과학학, 기술 *
존 무알렘(Jon Mooallem) – 자연, 동물
미셸 네이하위스(Michelle Nijhuis) – 환경
리처드 콘니프(Richard Conniff) – 자연, 동물 *
로버트 M. 새폴스키(Robert M. Sapolsky) – 생물학, 의학 *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 – 물리학 *

총 4회:
버크하르트 빌저(Burkhard Bilder) – 자연
데니스 오버바이(Dennis Overbye) – 물리, 천문학 *
제롬 그루프먼(Jerome Groopman) – 의학, 생물학 *
티머시 페리스(Timothy Ferris) – 천문학 *

총 5회:
아툴 가완디(Atul Gawande) – 의학 *
데이비드 쾀멘(David Quammen) – 자연, 동물 *
맬컴 글래드웰(Malcolm Gladwell) – 사회학, 심리학 *
내털리 앤지어(Natalie Angier) – 생물학 *

총 6회:
로버트 쿤직(Robert Kunzig) – 해양학, 환경

총 7회:
마이클 스펙터(Michael Specter) – 보건, 의학

기라성 같다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만한 근사한 명단이 아닌가. 아툴 가완디가 5회나 오른 것을 보라. 가완디는 그냥 ‘글 좀 쓰네’ 하는 수준의 의사가 결코 아니다. 맬컴 글래드웰이 5회인 것도 재밌다. 요즘은 과학 관련된 글은 거의 안 쓰지만 예전엔 과학 저널리스트였지. 이 명단의 이름들 중 제일 젊은 사람, 그리고 최근이 전성기인 사람은 [뉴욕 타임스]에서 과학을 맡고 있는 칼 짐머일 텐데, 그래 봐야 3회이니 벌써 몇십 년째 과학 기사를 써온 60, 70대의 선배들에 대려면 앞으로도 더 많이 써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예의 1위는 공동인데…

총 9회:
엘리자베스 콜버트(Elizabeth Kolbert) – 환경 *
올리버 색스(Oliver Sacks) – 생물학, 심리학 *

[여섯 번째 대멸종]이 가장 최근에 번역된 콜버트와 설명이 따로 필요 없는 올리버 색스는, 그러니까, 18년 동안 거의 격년으로 선정된 셈이다. 너무 멋지다. 2015년 사망한 색스는 16년 책에 마지막으로 실렸고, 마지막으로 실린 글은 ‘나의 주기율표’다. 번역본 [고맙습니다]에 수록되어 있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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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는 포함되지 않은 나머지 이름들도, 과학책과 과학 기사를 꾸준히 읽어온 독자에게는 무척 익숙한 이름들. E. O. 윌슨, 제인 구달, 프리먼 다이슨, 닐 더그래스 타이슨 같은 전업 과학자들도 있고, 바버라 킹솔버, 니콜러스 카, 재런 레이니어, 샘 킨, 사이 몽고메리, 팀 플래너리처럼 책으로 더 유명한 작가들도 있다.

의외의 이름들도 있다. 내가 발견하고 가장 기뻤던 이름은 둘, 앤 패디먼과 리베카 솔닛이다.

패디먼은 ‘물속에서’라는 글이 실렸다. 이 글은 번역본 [세렌디피티 수집광]에 실려 있다. 솔닛은 ‘분리시키는 질병 – 나병은 어떻게 감정이입을 가르치는가’가 실렸다. 이 글은 아직 단행본으로 묶이지 않았고 번역도 없지만, 전문을 웹에서 읽을 수 있다. https://harpers.org/archive/2013/06/the-separating-sickness/ 읽어보니 정말 좋은 과학 에세이라고 할 만하다. 하긴 솔닛은 늘 분야가 무의미한 글을 쓰니까. 언젠가 시간이 나면 번역해보고 싶다.

2017년 최고의 과학 웹사이트 10

(RealClearScience의 기사를 번역해보았다. 원문은 여기.)

rcsc-home-logo

한 해가 끝나갑니다. 리얼클리어사이언스(RealClearScience)는 지난 11개월 동안 나왔던 훌륭한 과학 저널리즘 및 커뮤니케이션 기사들을 모두 되짚어보고, 누가 최고의 기사를 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매일 모니터하는 수백 개의 블로그와 웹사이트 중에서 최고로 평가된 곳은 다음과 같습니다.

20~11위: 인터넷에서는 뭐든지 늘 10위까지 순위를 매기는 것 같지만, 이 경우에는 그러면 많은 훌륭한 웹사이트가 주목받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20위에 든 다른 웹사이트들과 블로그들도 특별한 순서 없이 알려드립니다.

사이언티픽아메리칸
노틸러스
컨버세이션
스타츠위드!
내셔널지오그래픽
BBC
파퓰러사이언스
디스커버
스미스소니언
애틀랜틱

그리고 영예의 10위에 든 웹사이트는…

10. 가디언

guar주요 신문들의 과학면은 계속 줄고 있지만, 가디언의 과학면은 건재합니다. 가디언의 유능한 기자들은, 그들이 각별히 좋아하는 고고학을 비롯하여, 최신 연구에 대한 좋은 기사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가디언의 웹사이트에 딸린 블로그에서는 다양한 주제에 관한 포스팅이 활발히 게시됩니다.

9. 기즈모도

giz연초만 해도 우리는 기즈모도가 10위에 들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조지 드보스키, 라이언 만델바움, 크리스틴 브라운은 과학을 독자들에게 이야기하면서 그 경이로움을 전달하고 건전한 회의주의도 견지하는 일을 멋지게 해냈습니다. 기즈모도가 여느 때 보이곤 하는 과장도 잘 억제하면서요.

8. 사이언스뉴스

news사이언스뉴스는 1922년부터 출간된 매체입니다. 과학계의 최신 뉴스를 완전하고 정확한 형태로 보도한다는 신조를 지금까지 착실히 지켜오고 있죠. 깔끔한 웹사이트와 방대한 분야를 망라하는 폭넓은 보도, 더 이상 뭘 바라겠습니까?

7. 뉴사이언티스트

new뉴사이언티스트는 작년에도 10위에 들었고, 올해도 들었습니다. 특히 천체물리학 분야에서 멋진 이야기를 잘 찾아낸 예리한 눈길과 믿음직한 기사들 덕분이죠.

6. 코스모스

cosmos코스모스는 인쇄물은 계간으로 출간되지만, 웹사이트에서는 간결하고 명료하게 작성된 기사들이 매일 업데이트됩니다. 게다가 이 잡지의 기자들은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이야기들과 연구들을 곧잘 찾아냅니다. 코스모스는 우리 목록에 처음 이름을 올렸습니다.

5. 라이브사이언스

live라이브 사이언스는 작년에도 5위에 올랐고, 올해도 5위를 지켰습니다. 라이브 사이언스의 차별점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간단명료한 기사들을 많이 게시하는 능력입니다. 라이브 사이언스는 과학계의 위키피디아나 마찬가지입니다.

4. 아르스테크니카

ars아르스 테크니카가 마지막으로 우리 목록에 든 지 몇 년 되었지만, 올해는 거침없이 5위 안에 진입했습니다. 에릭 버저, 베스 몰, 애너리 뉴이츠, 존 팀머 같은 베테랑 과학 기자들의 뛰어난 보도 덕분이죠. 명석하면서도 비판적인 과학 기사를 찾는다면, 멀리 갈 것 없이 아르스를 보세요.

3. 콴타

quanta콴타는 대체로 가장 해독하기 어려운 분야들을 – 수학, 이론물리학, 컴퓨터 과학, 기초 생명과학 – 과감히 다루어 그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또한 이해할 만하게 들려줍니다. 콴타가 매년 더 나아지는 것을 보자면, 이 잡지가 조만간 5위권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2. 네이처

nature우리 목록의 꼭대기를 고고하게 지켜온 네이처 뉴스가 거기에서 물러나는 날이 오기는 왔군요. 하지만 여전히 네이처의 보도는 모범 그 자체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불만은 네이처가 기사를 충분히 많이 게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 많이 보여달라고요!

1. 사이언스

436641_5_축하합니다, 사이언스 매거진의 뉴스 부서! 사이언스는 정치, 문화, 기술, 학계 등 많은 영역을 망라합니다. 저 모든 영역을 다 파헤쳐서 과학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최신 연구 내용만을 상세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최신 정책과 논쟁까지도 알 수 있죠.

Caroline Knapp – Time Alone

캐럴라인 냅의 유고 에세이집 [명랑한 은둔(The Merry Recluse)]에서 한 편을 더 번역해보았다.

혼자 있는 시간
-고독과 고립의 경계에서 잘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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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임은 두 주째, 혹은 세 주째쯤에 시작된다.

처음에는 이렇게 지적한다. ‘너 요즘 혼자 보내는 시간이 엄청 많구나. 안 그래?’
그러고는 이렇게 말한다. ‘맘 편한 일이야. 그렇지? 보호받는 느낌, 안전한 느낌이 들잖아.’
마지막으로 이렇게 유혹한다. ‘더, 이 편안하고 고독한 상태를 더 이어가자. 바깥 세상은 무섭고 위험이 가득해. 그러니까 그냥 여기 있자. 혼자. 안전한 곳에.’

이것은 고립의 목소리, 설득력 있고 음흉한 목소리다.
나는 이 목소리를 많이 듣는다.

전화가 울린다. 받을까 말까 망설인다. 으, 사람들이랑 이야기하는 건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든단 말이야. 자동응답기가 받게 내버려두자. 저녁 약속이 일주일 뒤로 다가온다. 마음 한구석에선 가고 싶으면서도, 빠져나갈 계획을 짠다. 어떻게 하지? 아픈 척할까? 느닷없이 집에 손님이 오게 되었다고 할까? 어떻게 빠져나가지?

아무런 사교 활동 계획이 없는 또 한 번의 고독한 밤. 그 전망에 나는 안도감에 막연한 압박감이 섞인 기분으로 마음이 흔들린다. 내가 은둔의 밤을 하루 더 견딜 수 있을까?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약속을 잡아야 하나? 다섯 번 중 네 번은 – 다섯 밤 중 네 밤은 – 고립의 목소리가 이긴다. 집에 머무는 것이 더 쉬우니까. 외롭겠지, 하지만 더 안심된다. 훨씬 더 안심된다.

우리는 고립을 지리와 상황의 결과로 여기곤 한다. 혼자가 된 과부, 남편은 죽고 아이들은 다 자란 여자, 그녀는 고립된 사람이다. 늙고 쇠약한 사람, 아예 물리적으로 바깥 세상에 나갈 수 없는 사람, 그들은 고립된 사람이다. 하지만 고립은 또한 마음의 상태일 수 있고, 실제로 종종 그렇다. 칩거해야 한다는 생각이 선택을 결정 짓는 상태인 것이다. 마치 심연으로 추락하는 것처럼, 나는 고립으로 추락한다. 어둡고 비자발적인 추락은 가속이 붙어, 저지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나는 혼자 있기를 선택하고, 그 선택을 연속 열 번이나 열다섯 번이나 스무 번쯤 하고 나면, 더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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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26ff321dd425cbbe7cf560e2078c836--cool-stuff-lauren얼마 전, 오랜 친구 하나가 내가 사는 도시로 와서 우리 집에서 커피를 한 잔 했다. 친구는 내 상황을 보고는 “사치”니 “편안함”이니 하는 말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나는 혼자 산다. 모든 가구를 내가 고르고, 모든 그림을 내가 걸고, 모든 잡동사니를 정확히 내가 원하는 위치에 두는 집에서. 친구는 둘러보고는 말했다. 정말 사치스러운 일이야! 친구는 내가 혼자 일하는 작고 단정한 작업실을 들여다보았다. 나 한 사람 외에는 다른 사람이 들어설 여지도 없는 방이지만, 그곳에는 일하는 동안 내 소매를 잡아당길 사람이 없고, 방해할 사람도, 모임이나 회의에 가자고 끌어낼 사람도 없다. 얼마나 편할까! 친구는 결혼했고, 풀타임으로 일하고, 어린 두 아이의 엄마다. 마지막으로 혼자 밤을 보낸 게 언제였던지 기억도 안 난다고 했다. 나로 말하면, 혼자 밤을 보낼 수 없었던 게 언제였던지 기억도 잘 안 난다. 친구는 중얼거렸다. “늘 혼자 있다니. 얼마나 즐거울까.”

글쎄,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내가 누리는 이런 수준의 고독이 즐거운 것은 사실이다. 사치와 안도감이 있다는 것도, 엄청난 자유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친구가 잠시 벗어난 시간과 혼자 있는 시간을, 쉴 시간과 빈 시간을, 고독과 고립을 헷갈리고 있다는 것도 안다. 마치 내가 일하지 않는 동안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집 안을 어슬렁거리며, 빵을 굽고, 끝도 없이 거품 목욕을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친구는 이 시간에서 끝없는 평온과 고요만을 보았다. 나로 말하면, 이 시간에서 그보다 좀더 걱정스러운 것, 그보다 분명 더 어려운 것을 본다. 내가 이렇게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내는 것은 그 시간을 늘 혹은 틀림없이 즐기기 때문이 아니다. 내게 그런 시간이 필요한 것 같기 때문이다.

고립은 – 고립되고 싶은 충동은 – 두려움과 자기 보호에 관련된 일이다. 고립은 고치를 만드는 것, 매혹적으로 편한 나머지 벗어나기 어려워지는 장소를 만드는 것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고립은 고독과는 무관하다. 물론 고독한 시간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는 사회적 의무로 꽉꽉 채워진 한 주의 중간에 참석한 파티에서, 방 안 가득한 25명의 사람들 속에서도 고립될 수 있다. 고립되었다고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도망치고 싶은 기분, 거리를 두고 싶은 기분, 내가 겉모습 너머에서는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혹은 문제투성이인지 아무도 모르게 하기 위해서 장벽을 세우고 그 뒤에 숨고 싶은 강박과 관계된 느낌이다. ‘날 여기서 꺼내줘.’ 그런 기분이다. ‘나는 불편해. 혼자 있고 싶어.’

고립은 또한 음흉하다. 우울증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것은 잡초처럼 슬금슬금 자라나서 당신을 붙들고는 다시는 놓아주지 않는 마음 상태다. 당신은 한동안 혼자 지내며, 그저 고독할 뿐인데… 그러다 어느새 고립된다. 당신은 만족하고 있는데… 그러다 어느새 외롭다. 당신은 스스로 잘 통제하고 있다고 믿는데… 그러다 어느새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상태에 갇힌다. 고독과 고립의 경계선은 무척 가늘고 모호하며, 우리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이기에 제대로 알아보기 어렵다.

내 친구 그레이스는 한때 고립되었지만 지금은 그냥 고독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레이스가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지만 그것은 두려움에서 나오는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를 깊이 이해하고 선택한 행동이라는 뜻이다. 5년 전, 10년 전만 해도 그레이스는 자기 집에 숨어 살았다. 친구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관계가 광적이고 복잡해서 만나고 나면 진이 빠지고, 뭔가 다친 것 같고, 이해받지 못한 기분이었다. 그레이스는 이 친구 아니면 저 친구를 만나서 저녁을 먹고는 집으로 돌아와서 문을 꼭 닫은 후 그 속에서 안도감을 느꼈으며, 품고 있던 의혹이 사실로 확인되었다고 느꼈다. 너무 힘들어! 너무 화나거나, 실망스럽거나, 지쳐! 혼자 있는 게 훨씬 더 쉬워! 그래서 그레이스는 고립되었다. 전화를 거의 받지 않았고, 초대는 극히 드물게만 받아들였으며 그럴 때도 늘 두려웠다. 그렇게 자신의 세상을 깎아서 줄여나갔다. 그러면서 걱정했다. “금요일 밤에 집에 앉아서 맛있는 닭 요리와 샐러드를 저녁으로 먹고 TV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지. ‘이게 삶일까? 나는 앞으로 40년 동안 계속 이렇게 살까?’”

지금 46세인 그레이스는 여전히 금요일 밤에 혼자 닭 요리로 저녁을 먹고 TV를 보면서 보내는 날이 많다. 하지만 걱정은 누그러졌다. 그녀를 은둔으로 몰아넣었던 두려움,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무방비 상태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누그러졌기 때문이다. 그레이스는 예전보다 더 바람직하고 더 풍요로운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흥미로운 데다가 생계가 되어주는 일을 갖고 있다. 좋은 심리치료사 덕분에 자신을 훨씬 더 잘 인식하게 되었고, 자신에게는 혼자 보내는 시간이 필요할 뿐 아니라 자신이 그 시간을 즐긴다는 사실도 더 또렷하게 느끼게 되었으며, 그 시간에서 공허함이 아니라 뿌듯함을 느끼는 능력도 더 기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고독과 고립의 차이다. 고독은 차분하고 고요하지만, 고립은 무섭다. 고독은 우리가 만족스럽게 쬐는 것이지만, 고립은 우리가 하릴없이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차이가 늘 분명하거나 선명하게 구분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두 상태가 늘 배타적인 것도 아니다. 고독은, 내 경험상, 자칫하면 미끄러지는 경사로다. 처음에는 안락하게 느껴지지만, 종종 아무런 경고도 자각도 없이 훨씬 더 어두운 것으로 변신할 수 있는 상태다.

얼마 전 7월 말의 화창한 일요일, 나는 집에서 차로 약 30분 거리인 자연보호구역으로 가서 개와 단둘이 달렸다. 이전 몇 주 동안 혼자 보낸 시간이 아주 많았다. 그나마 정기적으로 만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은 마침 다들 휴가를 가거나 출장을 간 터였다. 나는 내 시각이 바뀌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고독하게 보내는 시간과 나날과 활동이 너무 많이 쌓이면서 내 정신에 뭔지 모를 침식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 내가 약간 미쳐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늘 이런 식이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좀 되다 보면 – 며칠 밤을 연속으로 혼자 보내거나, 며칠 동안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연속으로 일하거나 – 한동안은 기분이 괜찮고, 편안하고, 만족스럽다. 그러나 그러다가 무언가 변하고, 이상한 자의식이 스멀스멀 마음에 깃든다. 자신이 완전한 문장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난 이렇게 혼자 저녁 식사를 만들고 있네. 난 이렇게 혼자 이를 닦고 있네. 혼자 있는 집이 안식처가 아니라 감옥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는데, 하지만 사교 생활이란 낯설고 혼란스러운 것으로 느껴진다. 어떻게 하는 건지 까맣게 잊어버린 활동처럼 느껴진다.

고독은 우리를 보호해주는 오빠, 아니면 연상의 친한 친구와 같다. 너무 잘 알기에 침묵조차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다. 고독은 기분 좋은 메시지를 속삭이며 우리를 달랜다. ‘여기 앉아, 긴장 풀어, 정신없는 일에서 잠시 벗어나렴. 넌 그래도 돼.’ 고립은 고독의 사악한 쌍둥이, 아니면 못된 친척이다. 그것은 예고도 없이 들이닥쳐서 우리를 비난하기 시작한다. ‘넌 바깥 세상을 제대로 다룰 수 없어. 넌 무능하고, 열등하고, 달라. 맨날 그렇게 혼자 지내는 것도 당연하지.’ 혹은 더 나쁘게도 우리에게 거짓말을, 그 유혹적인 속삭임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네 삶에 다른 사람은 별로 필요없어, 너도 알잖아. 넌 혼자로도 완벽하게 괜찮아.’ 이것은 자족감으로 가장한 두려움의 목소리, 독립성으로 가장한 고립의 충동이다. 사실 내 마음 깊은 곳에는 친구 그레이스가 한때 압도당했던 것과 같은 불안이 담겨 있다. 바깥 세상은 무섭고 위험으로 가득한 곳이라는 느낌, 다른 사람들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도록 허락하면 그들이 반드시 나를 실망시키거나 다치게 할 것이라는 확신, 스스로가 취약해지는 것이 너무 싫다는 생각. 이것은 모두 지극히 인간적인 두려움들이고, 더구나 지극히 강력한 두려움들이라, 내가 너무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내기 시작하면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리기 시작한다. ‘혼자 있도록 해. 집에 있도록 해. 안전한 곳에.’ 이 목소리들에 이끌려 나는 저녁 초대를 거절하고, 친구들에게 전화할까 하다가 그만두고, 서서히 아래를 향해 추락한다. 고독은 외로움이 되고, 외로움은 의기소침이 되고, 의기소침은 무기력과 절망이 된다. 나는 문득 고개를 든다. 이미 나는 고립되어 있다.

나는 달리면서 골똘히 이런 생각을 했다. 고독이 얼마나 쉽게 고립으로 변하는지, 마음을 달래던 자족감이 얼마나 쉽게 소격감으로 대체되는지, 일단 세상에서 한 발 물러나고 나면 도로 돌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마치 어쩌다 외계의 궤도에 진입해버렸는데 아무리 해도 정상적인 궤도로, 인간의 궤도로 다시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고독은 평화와 고요를 키우는 일이다. 하지만 고립은 두려움에 굴복하는 일이고, 우리가 두려움에 더 많이 굴복할수록 우리를 붙잡은 그것의 손아귀 힘은 더 세진다. 사람을 만나지 않고 너무 오래 지내다 보면 지극히 간단한 사회 활동마저 – 다른 사람을 만나서 커피를 마시거나, 외출해서 저녁을 먹거나 – 엄두가 안 나고 무섭고 지치는 일로, 꼭 프랑스까지 헤엄쳐서 가는 일이나 다름없는 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 물러나고, 혼자라도 완벽하게 괜찮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합리화하기 시작한다. 그날 달리면서 나는 생각했다. ‘봤지? 난 이렇게 개와 함께 숲을 달리고 있어. 즐겁고 건전한 활동, 내가 행복하게 독립적인 상태라는 걸 보여주는 증거야.’ 우리는 달리고 또 달렸다. 엔도르핀의 도시를. 그러다 속도를 줄여 느긋하게 걸으며 호숫가에서 어슬렁거렸다. 나는 작대기를 집어서 던졌고, 개가 그것을 물고 헤엄쳐서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미소 지었다. 기분이 밝아지고, 빛이 돌아왔다. 차로 돌아가면서 생각했다. ‘난 할 수 있어. 이렇게 내내 혼자 지내면서도 이 시간을 즐길 수 있어.’ 그리고 손을 내려다본 순간, 어디선가 열쇠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인간의 궤도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면 꼭 이렇다. 시각이 왜곡되고, 방향을 잃은 듯한 느낌, 내 나름의 방식으로 살짝 미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나는 달리는 동안 손에 열쇠들을 쥐고 있었는데, 멍하니 넋이 나간 상태에서, 슬금슬금 의기소침해지는 상태에서, 그것들을 그냥 떨어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차 열쇠, 집 열쇠, 모든 열쇠를. 열쇠를 찾는 걸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벌 열쇠를 갖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거기 혼자 있었다.

고독의 즐거움과 고립의 절망감. 이 이미지는 며칠 동안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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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세 이후의 삶에 관한 에세이를 모은 [시간의 마지막 선물(The Last Gift of Time)]에서, 작가 캐럴린 하일브런은 자신이 삶에서 달성하고자 평생 애써온 이상이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그것은 “사적인 공간이 충분하되 지속적인 교유가 있는” 상태다. 하일브런에게 사적인 공간은 시골의 작은 집이라는 형태로 실현되었고, 교유는 가족과 소규모의 친밀한 친구들로 충족되었다. 하지만 하일브런의 글을 읽다 보면, 이 조합은 – 우정으로 조절된 프라이버시 –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넘어선 일이라는 느낌, 그 조합을 키워내는 일은 오히려 주로 감정적인 작업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자신에게는 시골의 작은 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집을 찾아내는 일, 또한 공감해주는 남편과 친밀한 친구들과 심장과 영혼을 모두 사로잡는 일을 찾아내는 일, 이것은 가공할 만한 작업이고, 종종 평생 추구해야만 하는 작업이며, 하일브런도 60세를 훌쩍 넘기고서야 비로소 적절한 균형을, 혼자 있는 시간과 남들과 함께하는 시간의 적절한 혼합을 달성했던 것이다.

그 적절한 혼합을 발견하는 것은 대단히 사적인 문제다. 혼자 있는 시간은 얼마쯤이면 충분할까? 얼마나 많으면 지나칠까? 안전하게 자신을 보호하는 상태는 언제 자신을 제약하는 상태로 변할까? 당신의 경우, 고독한 행복이 언제 변질하기 시작하여 고립된 절망으로 변형되는가? 하루가 지나면? 열흘? 한 달? 세상을 차단해버리고 싶은 충동은 언제 닥치며, 그 진정한 동기는 무엇인가? 당신이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낫기 위해서인가, 숨기 위해서인가?

내가 고립되고자 하는 충동에 본격적으로 굴복하기 시작한 것은 약 2년 전 술을 끊은 뒤였다. 이전까지 내가 너무 오랫동안 술로 무디게 누그러뜨려왔던 감정들이 – 두려움, 오래된 상처와 실망, 너무 오래되거나 갓 생겨난 터라 그 근원을 확인하기도 어려웠던 슬픔 – 그때 온 기세로 돌아와 들이닥쳤다. 그러니 내가 고분고분 웅크리기 시작한 것은, 고립의 목소리가 너무나 유혹적으로 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종종 그 충동에 탐닉하는 것이 과연 건강한 일인지, 아니면 자기 파괴적인 일인지 헷갈린다. 한동안 숨어 있어도 괜찮은 걸까? 이 안전한 공간에 매일 밤 안락하게 웅크리고 있어도 괜찮을까? 아니면 더 활기차게 사교 생활에 몸을 던져야 하나? 성장이 저지된 사회 생활을 살아가면서도 다른 종류의 성장은 저지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혼자 있는다는 것, 그 모든 다양한 형태는 – 혼자 살거나, 싱글이거나, 배우자나 가족이나 친구들과 떨어져 지내는 시간을 갖거나 – 연습이 필요한 기술이다. 고독은 어려운 일이다. 자신을 돌볼 의욕이 있어야 하고, 자신을 달래고 즐겁게 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사교적인 생활을 가꾸는 것도 역시 어려운 일이다.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기꺼이 취약해질 줄 알아야 한다. 캐럴린 하일브런이 그 쌍둥이 기술을 터득하는 데는 60년이 걸렸다. 내 친구 그레이스는 40대 중반인 지금 그 목표에 다가가고 있다. 20년 동안 혼자 살아온 그녀는 이제 프라이버시와 교유의 균형을 예전보다 더 자주 달성할 줄 안다. 나로 말하면,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이다.

-199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