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원소 이야기 –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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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셰리 지음, 올리버 색스 서문, 김명남 옮김, 궁리 펴냄

상상해보자. 만에 하나 세상의 모든 지식이 파괴되어 우리가 단 하나의 문장만을 후대에 전할 수 있다면, 어떤 말을 전해야 최대한 많은 정보를 담은 것이 될까? 전설적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은 다음 문장일 것이라고 말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원자로 이뤄져 있다.”

더 상상해보자. 현대 물리학과 화학의 기반인 원자론을 요약한 저 문장에 더불어 우리가 하나의 도표나 그림을 더 전할 수 있다면, 무엇을 고를까? 파인먼도 아닌 내게 누가 그것을 골라 보라고 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만약 누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원소 주기율표를 고를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원자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원자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며 그들의 속성과 관계는 주기율표에 잘 요약되어 있다는 사실, 이 두 가지 사실을 알면, 나머지 지식이 깡그리 파괴된 세상의 사람들도 비교적 쉽게 현대 과학을 재건할 수 있지 않을까.

***

원소 주기율표는 현대 화학의 토대이자 상징이다. 현대 생물학에 DNA 이중나선이 있고 현대 물리학에 원자 구조 모형이 있다면, 화학에는 주기율표가 있다. 주기율표는 1869년 멘델레예프가 당시로서 최선의 형태를 고안하여 과학계의 인정을 받아낸 이래 150년 동안 화학의 굳건한 토대로 기능했다. 그사이 우리의 지식이 원자의 실체조차 확신하지 못하던 수준에서 인위적으로 원자를 쪼개고 합하는 수준까지 팽창했음에도, 주기율표는 결코 기각되지 않고 오히려 범위를 넓혀가며 그 모든 지식을 담아내는 틀이 되었다. 약간 비약해서 말하자면, 지금까지 확인된 118개 원소가 표시된 주기율표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현대 물리학과 화학의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주기율표에서 길어 낼 수 있는 정보는 무궁무진하다.

주기율표에는 어떤 정보가 숨어 있을까. 이를테면 118개 원소들의 원자가 각각 얼마나 큰지, 원자에서 전자 하나를 떼어 내거나 거꾸로 붙이는 데 에너지가 얼마나 드는지, 금속 성질을 얼마나 강하게 띠는지, 화학 결합을 할 때 최대 몇 개까지 하는지, 상온에서 기체일지 고체일지 액체일지, 색깔은 어떨지, 다른 어떤 원소들과 잘 결합할지… 어떤 원소가 세로로 나열된 7개 주기와 가로로 나열된 18개 족이 이루는 격자 속에서 어느 위치에 놓이는가를 알면, 화학자는 위의 성질들을 대충 예측할 수 있다.

이렇듯 원소의 성질에 주기성과 규칙성이 있다는 사실 덕분에 화학은 예측과 계획이 가능한 과학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규칙성이 원자를 구성하는 전자, 양성자, 중성자의 수와 배치 때문에 생긴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점에서 현대 물리학과 화학이 하나로 이어졌다. 여담이지만, 내가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것도 바로 이 주기율표의 매력에 끌려서였다. 학생들은 흔히 화학은 (물리학이나 수학과는 달리) 산만한 정보를 잔뜩 외워야 하는 과학이라고 여기곤 하는데, 화학이 교육되는 방식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 수는 있어도 알고 보면 이것은 이만저만한 착각이 아니다. 전자가 오비탈에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가가 주기율표에서 원소들의 화학적, 물리적 성질을 결정하는 요인이라는 것을 배우는 순간, 그 아름다운 규칙성을 아는 순간, 화학은 더없이 질서 정연한 체계가 되고 주기율표는 더없이 입체적인 보물 창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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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기율표에는 또 다른 측면의 정보도 들어 있다. 원소들이 발견된 과정에 관한 역사적 정보다. 어떤 원소가 어디에서 어떤 기법으로 누구에 의해 발견되었는가 하는 사연에는 현대 화학이 발전해온 과정이 담겨 있다. 그래서인지 화학에 관한 대중서를 쓰는 작가들 중 어지간한 사람은 다 주기율표에 대한 책을 한 권씩은 썼다. 피터 앳킨스도, 필립 볼도, 샘 킨도 썼다. 화학자는 아니지만 여느 화학자보다 더 열렬히 원소를 사랑했던 신경의학자 고 올리버 색스도 빼놓을 수 없다. 색스는 원소 샘플을 수집하는 마니아로도 유명했고, 영미권에서 출간된 주기율표 책에는 거의 모두 추천사를 썼으며(과장이 아니라 내가 읽은 책에서는 다 그랬다), 당연히 이 책에도 서문을 써 주었다. (이 책 5장 마지막을 보면 색스가 저자에게 책의 내용에 관한 정보를 주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색스는 얼마나 애정과 지식이 넘치는 주기율표 마니아였던지!) 이처럼 주기율표는 화학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데도 중요한 기반이다.

그리고 주기율표에 관한 한, [일곱 원소 이야기]의 저자 에릭 R. 셰리를 능가하는 전문가는 또 없다. UCLA 화학과에서 화학사를 가르치는 셰리는 과학철학 중에서도 화학에 초점을 맞춘 학술지를 만들고 이끈 학자이고, 그의 주된 관심사가 주기율표다. 셰리는 많은 논문 외에도 2007년에는 [주기율표 이야기]라는 책을 썼고, 2011년에는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의 ‘아주 짧은 입문서(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 중 한 권인 [주기율표]를 썼다. 그러니까 만약 여러분이 주기율표의 역사와 의미에 관해서 뭔가 알고 싶은 것이 있다면 첫 번째로 찾아갈 만한 사람이 바로 셰리다.

그 셰리가 [일곱 원소 이야기]에서 초점을 맞춘 것은 주기율표에서 우라늄 아래의 92개 원소 중 마지막까지 빈칸으로 남았던 일곱 원소들이다. 셰리가 “하우라늄 원소”라고 부르는 이 원소들은 이른바 초우라늄 원소들과는 좀 다르다. 초우라늄 원소들은 발견 당시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인공적으로 합성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한편 하우라늄 원소들 중에서도 이 책의 주인공인 일곱 원소가 왜 특별한가 하면, 이 원소들은 과학자들이 원소를 원자번호에 따라 배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주기율표에서 정확히 어디어디 빈칸이 남았는지를 확인한 뒤에 남은 이른바 ‘성배’들이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과거와는 달리 분명히 정해진 목표를 놓고 남들보다 먼저 그것을 발견하려고 경쟁했으므로, 이 원소들의 이야기에는 우선권을 둘러싼 분쟁이 두드러진다. 셰리는 그 일화들을 통해 과학적 발견이 객관적으로 쉽게 확인되는 사건일 것이라는 생각은 얼마나 착각인지 알려준다. 원소 발견은 언뜻 “발견하든가 못 하든가 둘 중 하나잖아?” 싶지만 전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 실제 과학 활동에는 늘 정치와 문화가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 무엇이 발견인지 합의하는 과정 자체도 지식 생성의 중요한 일부라는 것, 이런 여러 과학철학적 논제들을 이 원소들을 통해 살펴본다. 앞부분에 간략하게 정리된 주기율표의 역사, 뒷부분에 짧게 언급된 주기율표의 미래도 흥미롭다.

셰리는 책에서 (그가 집필을 마무리했던 2013년) 현재 원소가 118번까지 발견됨으로써 주기율표에 빈칸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고 적었다. 그 사정은 번역본이 출간되는 지금도 그대로이지만, 다만 그사이에 맨 마지막 네 원소가 정식 이름을 갖게 되었다. 113번, 115번, 117번, 118번 원소는 일본, 러시아, 미국의 연구진이 2000년에서 2010년 사이에 합성했다고 진작 발표했으나 그 주장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최근이다. 2016년 11월, IUPAC(국제순수응용화학연맹)은 네 원소에 니호늄(Nh), 모스크븀(Mc), 테네신(Ts), 오가네손(Og)이라는 이름과 기호를 승인했다. 이제 과학자들은 새롭게 8주기를 개시할 119번 원소를 비롯하여 더 큰 원자번호의 원소들도 합성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성과에 따라 주기율표는 앞으로도 더 확장될 테고, 어쩌면 지금과는 형태가 달라질지도 모르며, 전혀 새로운 원소와 물질의 비밀이 드러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학생들은 주기율표에 매료되어 화학을 공부하기 시작할 테고,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화학의 상징은 주기율표일 것이다.

2018년 1월
김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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