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도킨스 자서전 – 옮긴이의 말

리처드 도킨스 자서전 1
리처드 도킨스 지음, 김명남 옮김 / 김영사

이 자서전의 주인공 리처드 도킨스에게, 2016년은 각별한 해다. 올해 75세인 도킨스는 지금까지 열세 권의 책을 썼다. 그중 첫 책이자 대표작인 <이기적 유전자>가 올해 출간 40주년이고, 세 번째 책 <눈먼 시계공>은 30주년, 다섯 번째 책 <리처드 도킨스의 진화론 강의>(원제는 ‘불가능의 산을 오르다’)는 20주년, 아홉 번째 책 <만들어진 신>은 10주년이다. 출판사들도 언론도 여기 주목하여, 그의 몇몇 대표작이 특별한 표지로 갈아입고 나오는가 하면 그의 저작들의 의미를 조명하는 기사가 연중 쏟아졌다.

그러니 영국에서는 각각 2013년과 2015년에 출간되었던 그의 두 권짜리 자서전을 마침 올해 우리말로 옮기는 일도 각별히 느껴질 수밖에 없었는데, 더구나 한창 번역을 진행하고 있던 올봄에 그가 가벼운 뇌졸중을 겪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도 이제 확실히 인생의 말년에 접어들었구나, 하고 새삼스레 놀라기도 했다. 그가 진작 옥스퍼드 대학에서 은퇴했으며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어쩐지 마음에서 그는 영원히 청년으로 느껴진 탓이다.

*

생물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리처드 도킨스의 이름은 모르지 않을 것이고, 설령 도킨스의 이름을 모르더라도 <이기적 유전자>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올가을, <경향신문>은 출판계 전문가들의 추천을 받아 해방 이후 우리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을 뽑아보았다. 그중 제일 많은 추천을 받은 상위 25권 목록에는 과학책이 딱 두 권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중 한 권이<이기적 유전자>였다(다른 한 권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였다).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가 <이기적 유전자>를 “인생을 바꿔놓은 책”으로 꼽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거니와, 학자가 아닌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기적 유전자>는 유전자의 관점에서 진화를 바라보는 시각을 처음 알려준 책이자 진화생물학의 입문서로 기능했을 것이다.

그다음으로 유명한 것은 (어떤 사람들 사이에서는 차라리 악명이겠지만) <만들어진 신>의 저자로서의 도킨스다. 그 책으로 그는 이른바 ‘신무신론’의 기수가 되었으며, 지난 10년 동안 회의주의와 과학적 기법의 합리성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필요한 가치라는 신념을 주장하는 일에 헌신해왔다.

그러나 <이기적 유전자>와 <만들어진 신> 외의 도킨스는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조지 C. 윌리엄스, W. D. 해밀턴 등이 제안했던 생물학적 통찰을 완벽하게 하나로 통합하여 이기적 유전자 관점을 구축한 것 외에, 도킨스가 독자적으로 기여한 바는 무엇일까? 그의 박사 논문 주제는 무엇이었을까? 학교에서는 어떤 선생이었을까? 나아가, 사생활에서는 어떤 사람일까? 그런 궁금증을 풀어주는 자료는 거의 없었으므로(기라성 같은 동료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도킨스에 대해서 쓴 글을 모은 <리처드 도킨스 – 우리의 사고를 바꾼 과학자>가 있긴 하지만, 이 책은 30주년을 기념한 논문집이었던 탓에 주로 그 주제에만 초점을 맞췄다), 이 자서전은 그를 좀 더 잘 알고 싶은 독자에게 거의 유일한 정보원으로서 소중한 의미가 있다.

자서전의 1권은 그의 출생부터 첫 책 <이기적 유전자>를 낸 35세까지 인생 전반부를 다루고, 2권은 이후 십여 권의 책을 더 쓰고 수많은 방송에 출연하며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생물학자가 된 인생 후반부를 다룬다. 어떤 독자는 그가 케냐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고서 첫 쪽에서부터 놀랄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그가 대대로 영국 식민주의의 혜택을 입어온 집안 출신이며 그 자신도 그런 배경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 밖에도 우리가 자서전에서 새롭게 알게 되는 사실을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테지만, “내가 쓴 책들의 내용을 여기서 시시콜콜 밝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책들은 아직까지 단 한 권도 절판되지 않았으니 여러분이 그냥 그 책들을 직접 읽으면 되기 때문이다”라는 도킨스의 천연덕스러운 말마따나, 여기에서 시시콜콜 다시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굳이 흥미롭다고 짚어두고 싶은 대목은 역시 그가 이름난 그 저작들을 쓰게 된 과정에 얽힌 뒷이야기들이다.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의 편집자 마이클 로저스가 <이기적 유전자> 원고를 읽고는 대뜸 그에게 전화를 걸어 “제가 꼭 이 원고를 가져야겠습니다!”라고 고래고래 고함 질렀다는 얘기, 도킨스가 그런 로저스에게 충성하는 의미에서 로저스가 출판사를 옮길 때마다 따라서 옮겨 다녔다는 얘기, 그리고 어떻게 도킨스가 과학 출판계의 “상어”로 불리는 저작권 대리인 존 브록먼과 손잡게 되었는가 하는 사연, 도킨스가 자기 책들 중에서 제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무엇이고 제일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얘기, “영혼의 쌍둥이”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로 훌륭한 독일어판을 만들어준 번역자 이야기와 리콜을 해야 할 만큼 형편없었던 스페인어판 이야기…

그의 인생을 수놓은 유명 과학자들, 친구들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그가 애정을 담아 따랐던 지도 교수 니코 틴베르헌, 글쓰기의 모범으로 삼았다는 피터 메더워, 가장 존경하는 선배인 듯한 존 메이너드 스미스 등등 저명 생물학자들과의 교분은 물론이거니와 대니얼 데닛, 캐럴린 포르코, 닐 디그래스 타이슨 등등 다른 분야 학자들과의 교분도 소개된다. 특히 한때 그의 숙적처럼 이야기되었던 스티븐 제이 굴드, 무신론의 쌍두마차로 그와 나란히 활약했던 크리스토퍼 히친스, 그가 유일하게 팬레터를 쓴 소설가였으며 그 인연으로 그에게 세 번째 아내인 배우 랄라 워드를 소개해주기도 했던 더글러스 애덤스를 회고하는 대목은 무척 뭉클하다.

그동안 도킨스의 논증적이고 논쟁적인 글에만 익숙했던 독자에게는 여담에서 여담으로 한없이 삼천포로 빠지기도 하는 이 자서전이 낯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태연자약하고 뻔뻔하게 말했듯이, “자서전에서 감상적인 말을 할 수 없다면 대체 어디서 하겠는가?”

*

도킨스는 이제 일종의 아이콘이 되었다. 진화의 유전자 중심 관점을 상징하는 아이콘, 우리 시대 대중 과학서를 상징하는 아이콘, 회의주의와 무신론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무릇 아이콘의 숙명은 그다지 달갑지 않은 숭배와 조금은 억울한 비난을 둘 다 과하게 받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영역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게 되고, 여러 오해와 실수가 영구히 박제되는 것이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런 아이콘의 자리를 지킬 게 분명한 도킨스이기에, 그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들려준 이 자서전이 너무 늦기 전에 출간된 건 그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고 우리에게는 만족스러운 일이다.

유명세라고 하니까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자서전 2권에는 웬 창조론자가 도킨스에게 공개 토론회를 제안했다가 거절당하자 무대에 빈 의자를 놓아두고 행사를 강행했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창조론자의 술책에 대해서, 도킨스는 에 공개적으로 제 입장을 밝히는 글을 쓰며 이렇게 말했다.

“크레이그가 내가 부재한 상태에서 토론하겠다고 하는 날 밤에 나를 볼 수 없는 장소는 옥스퍼드만이 아니다. 그날 여러분은 케임브리지, 리버풀, 버밍엄, 맨체스터, 에든버러, 글래스고, 그리고 만일 내 시간이 허락한다면 브리스틀에서도 내가 나타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점잖으면서도 신랄한 유머에 웃지 않을 독자가 있을까. 도킨스는 무엇보다도 최고의 작가다. 이 자서전은 그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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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한국어판 제목이 <리처드 도킨스 자서전>인 것에 대해서 한마디 변명을 해둬야 할 것 같다. 이 책에서 도킨스가 똑같이 영어로 된 책인데도 영국판 제목과 미국판 제목이 다른 것을 불평한 걸 보았으니까 말이다.

영국에서는 이 자서전의 두 권이 2년의 간격을 두고 마치 서로 독립적인 책인 것처럼 출간되었지만, 한국어판은 함께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원제에 숨은 사소한 말장난을 살려서 옮기는 것이 내게 역부족이었다. 1권의 원제 ‘경이를 향한 갈망’은 원래 <무지개를 풀며>의 부제(‘과학, 망상, 그리고 경이를 향한 갈망’) 중 한 대목인데, <무지개를 풀며>의 한국어판에서는 이 부제가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참조의 의미가 적어졌다.

한편 2권의 원제 ‘어둠 속의 짧은 촛불’은 도킨스가 2권의 서두에 인용한 세 문구를 노골적으로 조합한 것인데(<맥베스>의 한 대목인 ‘짧은 촛불’과 칼 세이건의 책 부제 ‘어둠 속의 촛불’을 합했다),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려면 ‘짧게 어둠을 비추는 촛불’ 정도로 옮겨야 좋겠지만 그러면 인용구들을 엮었다는 뜻을 전달하기 어렵다. 그래서 원제의 부제만을 살리고 제목은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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