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세이건의 말 – 옮긴이의 말

칼 세이건의 말
칼 세이건 지음, 김명남 옮김 / 마음산책

우리 시대 과학의 얼굴 혹은 대변인을 뽑으라면 누가 후보에 오를까. 물리학자로는 물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첫손가락에 꼽힐 테지만, 그 밖에 유쾌한 천재의 전형인 리처드 파인먼, 육체의 역경을 딛는 정신의 탁월함을 상징하는 스티븐 호킹도 물망에 오를 것이다. 생물학자로는 ‘이기적 유전자’와 ‘전투적 무신론자’의 아이콘 리처드 도킨스가 있겠고, 대변인의 작업에 좀 더 충실한 이를 떠올리자면 지극히 우리 시대적 현상인 자연 다큐멘터리의 간판 해설자이자 동물학자 데이비드 애튼버러도 있다.

훌륭한 대변인에게는 여러 자질이 필요하다. 제 분야의,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과학의 지형도와 역사를 꿰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려니와 사회와 예술에도 교양이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다른 언어를 쓰는 것이나 다름없는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 과학을 따로 공부한 적 없는 대중에게 말을 걸겠는가. 나아가 그가 제 분야에서도 뛰어난 전문가라면 더 좋을 테고, 연구와 외부 활동 양쪽에 관여하여 과학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 잡힌 사람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 그러고도 또 바란다면 호감 가는 친근한 인상일 것. 물론 말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겠다. 아무리 자질이 뛰어난 이라도 눌변이어서야 곤란하리라.

이런 모든 측면에서 총평하자면, 결론적으로 칼 세이건만 한 적임자는 없다. 올가을에 <경향신문>은 출판계 전문가들의 추천을 받아 1945년 해방 이후 우리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을 뽑아 보았는데, 그중 제일 많은 추천을 받은 상위 스물다섯 권 목록에 포함된 두 권의 과학책 중 한 권이 세이건의 <코스모스>였다(다른 한 권은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였다). <코스모스>는 미국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우리 시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과학책이라 말해도 과장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그 저자인 세이건은 우리 시대 과학의 얼굴이자 대변인이라 해도 무리한 말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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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된 후보들이 나름대로 제각각 대중에게 잘 알리긴 했으나 그 누구보다도 세이건이 더 잘 알렸던 메시지, 그것은 바로 과학이 안기는 경이로움과 과학에 기댄 합리적 사고방식의 중요성이었다. <코스모스>와 <창백한 푸른 점>은 과학의 경이를 예찬하는 송가였고,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은 어두운 세상을 헤쳐가는 데 지팡이가 되어주는 수단으로서 과학적 회의주의를 지지하는 호소문이었다. 이 책 <칼 세이건의 말>에서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세이건의 핵심 메시지는 그 두 가지다.

그런데 세이건이 과학의 대변인으로서 갖춘 자질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일단 ‘기꺼이 말하려는 자세’였다. 이 책의 한 인터뷰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세이건은 과학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연구가 어떤 내용이고 어떤 의미인지를 대중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심지어 그것이 의무라고까지 믿었다. 그는 과학에 속속들이 의존한 현대 사회에서, 더구나 정책 결정의 궁극적 권한이 시민들에게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보통 사람들이 과학을 알지 못하는 것은 재앙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여겼다. 과학자는 자신의 연구에 적절한 사회적 지원을 얻기 위해서라도, 또한 과학자이기 이전에 한 명의 시민으로서 사회적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아는 것을 남들에게 알려서 모두에게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세이건의 이런 신념에 다른 과학자들이 모두 동감한 것은 아니었다. 유독 과학자 세계에서는 앞에 나서서 말하는 사람을 일단 경계하고 보는 분위기가 강하다. 모름지기 과학자라면 증거로, 수치로, 사실로 말해야지 쇼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야 물론, 과학자가 제 전문성 덕분에 얻기 마련인 발언의 무게감을 그릇되거나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잘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세이건이 얼마나 ‘잘 말하는지’는,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어린아이들의 지성을 얕잡지 않으면서도 그들에게 얼마나 쉽게 과학을 설명했는지를, 과학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지 않으면서도 얼마나 단호하게 그들의 오류를 지적했는지를, TV와 라디오에서는 얼마나 능란하게 청취자의 관심을 붙잡아둘 줄 알았는지를.

만일 살아 있었다면 올해로 여든두 살이었을 세이건은, 21세기 들어 더욱 반지성주의와 종교적 근본주의가 횡행하는 오늘날의 세상을 보고서, 그러니까 더더욱 과학자들이 나서서 말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이 책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그는 과학적 합리주의와 민주주의는 같은 가치들을 공유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느 한쪽만 가질 수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가 후자를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전자를 강화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과학자들이 정치와 경제와 환경에 대해서 좀 더 많은 말을 좀 더 넓은 청중에게 건네야 한다고 믿었다.

*

생물학자 도킨스는 만일 세이건이 아직 살아 있었다면 그를 반드시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세이건이 쓴 글들은 훌륭한 과학일뿐더러 훌륭한 문학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세이건은 이미 우리 곁에 없다. 올해 12월로 그는 사망한 지 꼭 20주년이 된다. 그러니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는 최초의 과학자가 될 일도, 우리가 그의 근사한 목소리를 더 들을 일도 없다.

그러나 어쩌면 그 사실을 크게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인류가 만든 인공물로서는 최초로 우리 태양계를 벗어나 별들 사이의 우주로 진입한 우주선 보이저 1호에는 세이건이 제작을 지휘했던 ‘골든 레코드’가 실려 있다. 그 안에 세이건의 육성이 담겨 있진 않지만(대신 그의 아들 닉 세이건이 영어로 “지구의 어린이들이 인사를 보냅니다”라고 말한 녹음이 실려 있다), 그 레코드에 기록된 모든 음악과 사진, 인류의 역사와 과학에 관한 모든 정보는 세이건이 취합한 것이었다. 언젠가 인류와 지구와 태양계마저 사라지더라도 마지막으로 남을 그 메시지, 어쩌면 언젠가 기적적으로 우주의 어느 외계인에게 인류를 소개할지도 모르는 그 메시지, 그것은 바로 세이건이 남긴 말이다. 세이건은 우리 시대 과학을 대표하는 대변인인 것을 넘어서 인류를 대표하는 대변인인 셈이다. 이 책에도 살아 있는 그 목소리, 그것은 곧 낭만과 쓸모를 둘 다 간직하고서 사회와 긍정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과학이 들려주는 목소리다. 최선의 과학의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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