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rard Kuiper & Max Planck

브랜던 R. 브라운의 2015년 5월 16일 글 ‘Gerard Kuiper’s Daring Rescue of Max Planck at the End of World War II’를 번역해보았다. 원문은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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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12516998061945년 5월, 미국 천문학자이자 이제 군인이 된 제러드 카이퍼가 나치 독일의 폐허 앞에 섰다. 원래 하늘을 바라보는 데 훈련된 그의 예리한 눈이 엘베 강 너머 동쪽을 바라보았다. 독일은 막 항복했지만, 그 일대는 아직 평화롭지 않았다. 적군들과 집 잃은 난민들이 무법자처럼 잔해를 누비며 먹을 것을 찾아다녔다. 한편 동쪽으로부터는 소련군이 욕심스럽게 영토를 집어삼키며 휩쓸어오고 있었다. 카이퍼는 전쟁에서 살아남았고, 이제 일급비밀 임무도 마친 참이었다. 그런데 왜 최후의 위험천만한 작전을 자처했을까?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독일어에 능통했던 카이퍼는 맨해튼 프로젝트과 좀 멀게 관련된 미국의 기밀 프로젝트, 알소스 작전에서 유능한 역할을 해낸 터였다. 그것은 소규모 과학자 팀이 전진하는 연합군의 전선 뒤를 따라가며 독일의 핵심 과학자들을 찾아내어, 독일이 원자폭탄 연구를 어느 정도 진전시켰는지 알아보는 프로젝트였다. 그들의 일은 거의 끝났고, 이제 독일 최고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그 동료들의 신병을 확보한 상황이었다. 알소스 작전은 독일 핵 프로그램의 부검을 끝냈고, 그 결과 그것이 놀랍도록 부족한 상태였다는 걸 알아냈다.

그런데 카이퍼는 무슨 소문을 하나 들었고, 시간이 촉박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과학적 권위자로 꼽히는 저명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를 구출할 생각이었다. 어느 독일인 포로가 말하기를 플랑크가 근처에, 엘베 강 동쪽으로 불과 몇 킬로미터쯤에 있는데 상황이 나쁘다는 것이었다. 카이퍼는 (우리가 아는 한) 플랑크와 아무런 개인적 관계가 없었다. 하지만 카이퍼가 학생이던 시절, 플랑크와 그보다 어린 친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각각 원자와 우주를 재포맷한 이론을 통해 쌍둥이 거인으로 우뚝 선 존재들이었다.

Gerard_Kuiper_1964플랑크는 알소스 작전의 표적이 아니었다. 그리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이 엘베 강 코앞에서 진군을 멈췄기 때문에, 플랑크를 구하려면 안전한 미군의 최전선을 넘어가야 했다. 한편 동쪽으로부터 다가온 러시아인들은 이제 100마일(160킬로미터)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역사학자 앤서니 비버가 묘사했듯이, “까만 패딩 헬멧을 쓴 탱크 부대와 덥수룩한 말에 올라 전리품을 안장에 비끄러맨 코사크 기병들이 공존하는, 현대와 중세가 기묘하게 뒤섞인” 소련군은 포스트아포칼립스적 악몽 그 자체였다. 그들은 독일이 자기네 조국을 잔인하게 범한 것을 갚아주겠다는 생각으로 맘껏 강간하고, 약탈하고, 살상했다. 소련군에게 붙잡힌 독일인들의 생존률은 50퍼센트 언저리였고, 몇 시간 후면 그 손길이 플랑크와 그 아내도 잡아챌 것이었다.

카이퍼는 미군 동료 둘을 모으고, 지프에 올라타, 전속력으로 엘베 강을 건넜다. 다행히 그는 플랑크 부부를 찾아냈고,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옴으로써 소련군의 손아귀를 면하게 했다.

나는 <플랑크>를 쓰려고 자료 조사를 하던 중, 당시 플랑크의 상태와 카이퍼의 짧은 모험을 좀더 잘 알려주는 독일어 문서들과 편지들을 번역했다. 플랑크와 그 아내는 엘베 강 근처 작은 마을인 로게츠에서 전쟁 난민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4월에는 그곳도 시끄러운 교전지역이 되었다. 플랑크의 아내 마르가는 독일 군인들이 기관총을 설치하고 사람들에게 경고를 발령했다는 말을 썼다. 전투가 임박하자, 플랑크 부부는 목숨을 부지하고자 달아나서 숲으로 숨어들어 헛간을 전전하며 지냈다. 87세의 플랑크는 자주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조금만 움직여도 관절염이 심하던 허리가 아팠기 때문이다.

독일이 항복한 뒤, 플랑크 부부는 엘베 강으로부터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 친절한 낙농업자의 집에서 은신처를 구했다. 방 하나짜리 오두막에서 농부의 대가족과 함께 지내던 플랑크 부부는 어떤 군대든 자신들에게 먼저 찾아오는 군대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카이퍼가 탄 지프는 오늘로부터 딱 70년 전 5월 16일, 오두막 앞에서 끽 멈춰 섰다. 문을 연 미군들을 마주한 것은 혼란과 두려움이었다. 농부의 가족과 딱 봐도 손님임에 분명한 두 사람은 변변찮은 점심 식사에서 고개를 들어 군인들을 바라보았다. 소련군이 당장이라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걸 알았기에, 카이퍼는 정중하지만 신속하게 제안을 전달했다. 우리가 두 분을 괴팅겐으로, 서쪽으로 안전하게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플랑크 부부는 기꺼이 수락했다. 괴팅겐에 친척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Brown Planck cover외톨이 지프는 부리나케 엘베 강을 건너 돌아왔고, 간발의 차로 러시아인들과 마주치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즉각 플랑크를 괴팅겐의 병원으로 옮겼고, 그는 그곳에서 몇 주 동안 요양했다. 플랑크는 독일인과 연합군이 둘 다 존경하는 몇 안 되는 독일 저명인사 중 하나였다. 독일인들은 그를 독일 물리학의 존경받는 지도자이자 대변인으로, 자기 나라가 제일 빛났던 전쟁 전 시절을 상징하는 자랑스러운 존재로 여겼다. 연합군은 그를 나치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던 인물로, 그리고 전쟁이 끝나가던 막바지에 나치 제국의 잔인함에 아들을 잃은 사람으로 알았다. 에어빈 플랑크는 독일 레지스탕스와 공모한 죄로 붙잡혀 몇 달간 취조와 고문을 당했으며, 결국 1945년 초 게슈타포에게 처형당했다.

뜻밖의 인연으로 한 지프에 탔던 두 사람은 이후 각자의 길을 갔다. 카이퍼는 미국의 망원경들로 돌아와서 행성들과 위성들에 대한 관측을 개척했다. 플랑크는 서독에 남아서 다시 한번 독일 최고 연구소를 이끄는 일을 자처하여 맡았는데, 이제 그 연구소에는 그의 이름이 붙어 있다. 양자 이론의 아버지로 언제까지나 기억될 플랑크는 1947년에 죽었고, 현대 행성 천문학의 아버지인 카이퍼는 1973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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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던 R. 브라운(Brandon R. Brown): 샌프란시스코 대학 물리학 교수로 <플랑크(Planck: Driven by Vision, Broken by War)>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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