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숨어서 쓴다
어젯밤 꾸었던 꿈을
꿈에 이르기 위해서 버렸던 생각을
숨어서 쓴다
숨어서 쓰고 싶다

무엇이든 너무 곰곰이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하지만 나는 번거롭게도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한번은 우리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친구가 나더러,
턱을 약간 들고 시선은 4시 혹은 7시 방향으로 내리되
눈꺼풀을 깔지는 않고 초점 밖을 아웃포커싱한 것처럼 넋을 놓은 나더러
“야 그런 표정 지으면 똑똑해 보이잖아” 라고 말했을 때,
그리고 시간이 많이 많이 흘러서 언젠가의 애인이 내게
예쁘다고 말하기보다 “어휴 정말 똑똑한 얼굴이야” 라고 더 자주 말했을 때,
“사실은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거야 나는” 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있나
그냥 웃었겠지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은 그냥 웃는 것

하지만 가끔은 정말로 그 표정으로 정말로 곰곰이 생각을 하는데
아마도 대체로 무언가를 저지른 날,
(((나)를 보는 나)를 보는 나)의 시선이 베개 옆에서
바로 그 눈길로 ((나)를 보는 나)를 본다
그러면 도무지 잠은 오지 않고,
진저리가 날 때까지 들여다보려무나 하고 허락할 밖에

그때 두려운 것은
낯부끄러운 것이나 수습되지 않은 것을 보는 게 아니라
– 그것은 어떻게든 견딜 수 있다는 착각을 준다 –
당연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는 것
(((아무것도 없음)을 보는 나)를 보는 나)가 되는 터무니없는 피곤함
혹은 낯부끄럽거나 수습되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차라리 그걸 무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아무것도 없어지고 싶다고
차라리 탈색되고 싶다고 버석해지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고통조차 귀찮아서 텅 비고 싶어지는 것

하지만 어쩌겠어
나는 대체로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은 표정일 뿐 아무것도 없는 껍데기인걸
그러니까 나의 차선은
아무에게도 기도하지 않고 오늘의 운세도 보지 않고 ((나)를 보는 나)에게 만족하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것을 계속 보는 것
눈길을 돌리지 않는 것
적어도 그럴 용기는 내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숨어서 쓰고 싶지도 않아지는 것
그럴 수 있기를 감히 바라는 것

그러나 오늘은 숨어서 쓴다
오늘 밤 버려야 할 생각을
숨어서 쓰지 않고는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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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thought on “어느 날

  1. 모니터와 눈 사이 허공에서 수십 개 넘는 문장들이 포목점 비단처럼 촤르륵 펼쳐집니다.
    어떤 문장을 고를지, 초조한 눈길로 이리저리 헤매다가 좌절해 버리고 맙니다.
    떠오른 문장들은 다 접어두고 댓글을, 그저 쓰고만 싶었다는 증거를 이렇게 남기게 되었습니다.

    창비에서 하는 팟캐스트에 출연하신 걸 듣고, 아니 사실은 그보다 훨씬 전 트위터에서, 믿기지 않도록 오랫동안 다른 것으로 바뀌어 걸리지 않는 그 프로필 사진이 머릿속에 박혀 버렸기에, 언젠가 정말 피치 못할 구실로 말을 건넬 수 있길 바래 왔기에, 이렇게요.

    시간이 끝날 때까지도, 번역하시는 분으로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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