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 Federer Both Flesh And Not

페더러, 육체이면서도 그것만은 아닌

테니스를 사랑하고 텔레비전으로 남자 경기를 챙겨 보는 사람이라면 거의 누구나, 지난 몇 년 동안 ‘페더러 순간’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어떤 순간인가 하면, 그 젊은 스위스 선수가 경기하는 것을 보면서, 입이 벌어지고 눈이 튀어나오고 자신도 모르게 무슨 소리를 내는 바람에 옆방에 있던 배우자가 당신이 괜찮은지 보러 오는 순간이다. 만일 당신이 테니스를 많이 쳐본 사람이라서 방금 그의 행동이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지 이해한다면, 그 순간은 좀더 강렬해진다. 누구나 그런 순간의 사례들을 갖고 있다. 가령 이런 것. 2005년 U.S. 오픈 결승전, 4세트 초반에 페더러가 안드레 아가시에게 서브를 넣는다. 오늘날 파워 베이스라인 게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나비 모양을 그리면서 그라운드스트로크가 몇 번 오가고, 페더러와 아가시는 서로를 양옆으로 흔들면서 베이스라인에서 점수를 따내려고 하는데… 그러다 갑자기 아가시가 대각선으로 강한 백핸드를 날려서 페더러를 왼쪽으로 한참 멀리 끌어내고, 페더러는 팔을 뻗어 백핸드로 겨우 그것을 받아넘기지만 공은 서비스라인에서 몇 피트 넘어간 곳에 짧게 떨어지는데, 물론 그런 숏은 아가시가 식은 죽 먹기로 받아내는 것이고, 페더러가 허둥지둥 방향을 돌려서 중앙으로 돌아오는 동안 아가시는 안으로 달려들어 튀어오른 짧은 공을 받아낸 뒤 아까와 똑같이 왼쪽 모서리에 강하게 꽂아넣어 페더러의 허를 찌르려고 하는데, 실제로 페더러가 허를 찔린 것이, 그는 아직 모서리 근처에 있기는 하지만 센터라인을 향해 달려오는 중이므로 이제 공은 그의 뒤에, 즉 그가 아까 있었던 자리에 떨어질 찰나이고 그가 몸을 다시 돌릴 시간은 없으며, 이제 아가시는 숏을 날린 뒤 네트로 다가들어 백핸드로 각도를 잡고 있는데… 이 순간 페더러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순간적으로 역추진을 해서 깡충거리듯이 서너 걸음을 뒷걸음질친 뒤, 그것도 불가능할 정도로 빠르게, 백핸드 코너에서 포핸드로 공을 맞히는데, 그러면서 그의 몸은 계속 뒤로 움직이고, 포핸드로 날린 공은 톱스핀을 먹어 네트에 있는 아가시를 지나쳐 사이드라인을 향해 떨어지는데, 아가시는 공을 향해 몸을 날리지만 공은 그를 스쳐 사이드라인으로 날아가면서 아가시의 왼쪽 코트 모서리에 정확히 꽂히고, 페더러에게 득점을 안기는 것이다. 페더러가 아직도 뒤로 떨어지면서 땅으로 착지하는 동안에. 그리고 관중이 충격을 받았을 때 나타나는 예의 순간적인 침묵이 이어진 뒤 그제서야 뉴욕 관중의 함성이 터져나오고, TV 해설자 헤드셋을 쓴 존 매켄로는 (꼭 혼잣말을 하는 것 같은 말투로) “저 위치에서 어떻게 득점을 올리지요?” 라고 중얼거린다. 매켄로의 말이 맞다. 아가시의 위치와 세계 정상급 속도를 감안할 때, 페더러가 공을 아가시가 닿지 않는 곳으로 넘기려면 폭이 2인치쯤 되는 파이프과도 같은 공간으로 집어넣어야 했다. 그런데 페더러는 그렇게 했다. 그것도 뒤로 움직이면서, 준비할 시간도 없고 몸무게를 숏에 싣지도 못한 상황에서. 그것은 불가능한 숏이었다. 꼭 영화 ‘매트릭스’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내가 대체 무슨 소리를 냈는지 나는 모르지만, 아내의 말에 따르자면 아내가 달려 들어와 보니 소파에 팝콘이 온통 널려 있고 나는 장난감 가게에서 파는 눈알처럼 눈이 튀어나온 채 무릎을 꿇고 있더라는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페더러 순간’의 한 예였다. 그조차도 TV에서 본 것이었을 뿐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TV로 보는 테니스와 현장에서 보는 테니스의 관계는 포르노 비디오와 진짜 인간의 사랑을 느끼는 것의 관계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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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의 측면에서, 내가 여러분에게 로저 페더러에 대해서 알려드릴 재미난 소식 따위는 없다. 25살인 그는 현재 살아 있는 테니스 선수들 중 최고다. 역사상 최고일지도 모른다. 약력과 인물 소개 기사는 넘친다. ‘60분’은 작년에 그에 대한 특집 방송을 했다. 당신이 로저 N.M.I. 페더러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 그의 배경, 고향 바젤, 그의 부모가 아들의 재능을 착취하지 않고 제정신으로 지원했다는 것, 그의 주니어 선수 시절 경력, 어릴 때 쉽게 무너지고 성질을 내는 문제가 있었다는 것, 그가 사랑했던 주니어 코치, 그 코치가 2002년에 갑자기 죽었던 사건이 페더러를 산산조각 냈으나 결국 담금질하는 계기가 되어 오늘날의 그가 되게끔 만들었다는 것, 통산 39회의 단식 우승, 8회의 그랜드슬램, 여자친구와 보기 드물게 착실하고 성숙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 여자친구는 그를 따라 여행하면서(남자 선수들 사이에서는 드문 일이다) 그의 일을 처리하는 매니저로 일한다는 것(남자 선수들 사이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다), 그의 구식 금욕주의와 정신적 강인함과 훌륭한 스포츠맨십과 전반적으로 점잖고 사려 깊은 것이 분명한 태도와 너그러운 기부 행위 – 이런 것은 모두 구글에서 한 번만 검색하면 줄줄이 나오는 것들이다. 알아서 찾아보시라.

이 글은 그보다는 관객이 경험하는 페더러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맥락에 대한 이야기이다. 특히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논제는, 만일 당신이 이 젊은 선수의 경기를 직접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면, 그런데 어느 날 직접 보게 된다면, 그것도 윔블던의 성스러운 잔디 코트에서, 말 그대로 말라 죽이는 햇살이 내리쬐고 그다음에는 비바람이 몰아친 2006년 두 주의 대회 기간에 그랬다면, 당신은 토너먼트의 기자단 버스를 몬 운전사 중 한 명이 말했던 것처럼 “완전 종교에 가까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표현은 사람들이 ‘페더러 순간’을 묘사할 때 의지하곤 하는 과장된 미사여구 중 하나라고 폄하하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운전사의 표현은 – 말 그대로, 일순간은 무아지경으로 – 진실이다. 그 진실이 떠오르는 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과 진지한 관람이 필요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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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경쟁 스포츠의 목표가 아니다. 그러나 최고 수준의 스포츠는 인간의 아름다움이 가장 잘 표현되는 무대이다. 그 관계는 용기와 전쟁의 관계와 대충 비슷하다.

우리가 여기에서 말하는 인간의 아름다움이란 특정한 종류의 아름다움이다. 운동적 아름다움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모른다. 그 아름다움의 힘과 매력은 보편적이다. 이것은 섹스나 문화적 규범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것은 오히려 인간이 육체를 가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과 관계가 있는 일이다.

물론, 남자들의 스포츠에서는 누구도 아름다움이나 우아함이나 육체 따위를 말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스포츠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 사랑은 늘 전쟁의 상징을 통해서 구현되고 재현된다. 제거(토너먼트에서의 탈락) 대 전진(토너먼트에서의 진출), 순위와 지위의 위계, 집착적인 통계와 기술 분석, 부족적 그리고/혹은 국가적 열정, 제복, 대중의 함성, 배너, 가슴을 두드리고 얼굴에 색을 칠하는 허세, 등등. 정확히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사랑의 부호보다 전쟁의 부호가 더 안전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만일 당신도 그런 사람이라면, 육체미가 넘치고 완벽하게 호전적인 스페인의 라파엘 나달이야말로 당신에게 어울리는 선수이다. 민소매로 드러낸 이두박근과 가부키 배우처럼 연극적으로 화이팅을 외치는 나달 말이다. 더구나 나달은 페더러의 숙적이고, 올해 윔블던의 가장 놀라운 이변이다. 그는 클레이 코트 전문가라서 그가 윔블던에서 몇 라운드 이상 진출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반면에 페더러는 준결승 내내 아무런 놀라움도 경쟁의 드라마도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상대를 매번 너무나도 철저히 완파했기 때문에, TV와 인쇄 매체는 그의 시합이 지루한 나머지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월드컵의 국가주의적 열정에 상대가 되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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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7월 9일 남자 결승전은 모든 사람의 꿈이다. 나달 대 페더러는 지난달 프랑스 오픈 결승전의 재현인데, 그때는 나달이 이겼다. 페더러는 올해를 통틀어 단 네 시합만을 졌는데 그게 모두 나달에게 진 것이었다. 그래도 그 시합은 대부분 나달이 제일 좋아하는 코트인 느린 클레이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페더러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잔디다. 한편, 첫 주의 더위가 윔블던 코트를 뜨겁게 익혀서 매끄러움이 좀 사라졌기 때문에 공이 좀 느려지기는 했다. 그리고 나달이 그동안 클레이에서 잔디로 많이 적응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이제 그라운드스트로크를 할 때 베이스라인에 더 가깝게 들어오고, 서브를 더 강하게 넣고, 네트에 대한 알레르기를 극복했다. 그는 3차전에서 아가시를 철저히 완파했다. 사람들은 열광에 빠져 있다. 결승전 직전 센터 코트에서, 라인맨들이 꼭 유아용 해군복처럼 보이는 새 랄프 로렌 유니폼을 입고 코트로 들어오는 동안, 남쪽 백스톱 위에 가로로 뚫린 유리창을 통해서 방송 해설자들이 의자에서 말 그대로 가만 있질 못하고 펄쩍펄쩍 뛰는 모습이 다 보인다. 이 윔블던 결승전에는 복수의 내러티브가, 왕 대 제왕살해의 구도가, 극단적인 인물 대조가 갖춰져 있다. 이것은 남유럽의 열정적인 남성성과 북유럽의 섬세하고 임상적인 예술성의 대결이다. 디오니소스 대 아폴론이다. 식칼 대 메스다. 왼손잡이 대 오른손잡이다. 세계 2인자 대 1인자다. 나달은 현대적인 파워 베이스라인 게임을 최대한 밀어붙인 선수이고… 그 상대는 그 속도와 발놀림 못지않게 뛰어난 정확도와 다양성으로 이 현대적 게임을 다른 것으로 바꿔놓은 사람이지만, 유달리 앞의 선수에게만큼은 맥을 못 추는, 혹은 기가 눌리는 선수이다. 영국의 어느 스포츠 기자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며 기자단의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두 번이나. “이 시합은 전쟁이 될 거야.”

더구나 이곳은 테니스의 대성당이나 다름없는 센터 코트다. 그리고 남자 결승전은 늘 두 주의 기간 중 두 번째 일요일에 벌어지는데, 윔블던은 첫 번째 일요일에는 아무 경기를 하지 않음으로써 이 결승전의 상징성을 더욱더 강조한다. 그리고 오전 내내 주차 안내판을 넘어뜨리고 우산을 홀랑 뒤집던 거센 강풍은 시합 한 시간 전에 갑자기 멎었고, 이제 해가 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센터 코트의 방수포를 돌돌 말아 걷고, 네트 기둥을 꽂는다.

페더러와 나달이 박수를 받으며 나와, 귀족들이 앉은 자리를 향해 의식적인 경례를 보낸다. 우리의 스위스인은 버터밀크 색깔의 스포츠 재킷을 입었다. 나이키가 올해 윔블던에서 그에게 입힌 옷이다. 페더러가 입으면, 그리고 오로지 그가 입었을 때만, 반바지와 운동화 위에 걸친 재킷이 한심해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스페인인은 체온 유지용 옷을 걸치지 않으므로, 우리는 그의 근육을 똑똑히 볼 수 있다. 그와 스위스인은 둘 다 나이키로 빼입었다. 매듭이 묶인 흰 나이키 헤드밴드를 한 것까지 똑같은데, 나이키의 갈고리 모양 로고가 이마 한가운데 오도록 맨 것까지 똑같다. 나달은 헤드밴드 밑으로 머리카락을 집어넣었지만, 페더러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헤드밴드 위로 나부끼는 앞머리를 그가 수선스럽게 매만지는 손놀림은 TV로 그를 보는 사람들이 목격하게 되는 그의 주된 버릇이다. 나달이 점수 사이마다 볼보이에게 가서 수건으로 땀을 닦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밖에 다른 버릇들과 습관들도 있다. 현장에서 경기를 보는 사람들만 마치 사소한 특권처럼 볼 수 있는 행동들이다. 로저 페더러는 스포츠 재킷을 코트 옆 여분의 의자 등받이에 걸 때 대단히 조심스러운 행동으로 건다. 주름이 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시합할 때마다 그랬는데, 그 모습에는 어쩐지 어린아이 같으면서도 기묘하게 매력적인 데가 있다. 그가 2세트 도중에 언젠가 반드시 라켓을 바꾸는 것도 그렇다. 그때 새 라켓은 늘 파란 테이프로 봉해진 투명 비닐 커버에 담겨 있는데, 그는 라켓을 조심스럽게 꺼낸 뒤 늘 볼보이에게 커버를 건네어 버려달라고 부탁한다. 나달도 습관이 있다. 서브 전에 공을 튕길 때 늘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긴 바지가 엉덩이에 낀 것을 잡아 빼는 것, 그리고 베이스라인을 걸을 때 마치 정강이가 차일 것을 기대하는 죄수처럼 좌우로 이리저리 경계의 눈길을 던지는 것. 그리고 스위스인의 서브에는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 아주 유심히 봐야만 알 수 있는 점이다. 페더러는 공과 라켓을 앞으로 죽 내민 뒤, 동작을 시작하기 직전에, 늘 라켓의 머리 바로 아래 목 부분에 난 V 모양의 구멍에 공을 정확하게 갖다 맞춘다. 아주 순간적이기는 하지만. 위치가 완벽하게 맞지 않으면, 그는 맞을 때까지 공을 조정한다. 아주 빠르게 지나가는 행동이지만, 첫 번째 서브와 두 번째 서브를 할 때 매번 벌어지는 행동이다.

나달과 페더러는 이제 정확히 10분 동안 몸을 푼다. 심판이 시간을 잰다. 프로들이 몸을 푸는 시간에는 아주 정확한 질서와 에티켓이 있는데, 텔레비전은 여러분이 이런 장면에는 관심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보여주지 않는다. 센터 코트는 13,000명 남짓을 수용한다. 그리고 그 밖의 수천 명은 사람들이 매년 자발적으로 하는 일을 하는데, 무엇인가 하면 정문에서 바가지에 가까운 일반 입장료를 내고서는, 바구니와 모기 퇴치제를 챙긴 채, 1번 코트 밖에 설치된 대형 TV 화면 앞에 모여 앉아 경기를 시청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본다고 해서 다른 데서 보는 것과 다른 점이 있는 것도 아닌데.

시합 직전, 네트 앞에서, 누가 먼저 서브를 넣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동전 던지기가 벌어진다. 이것도 윔블던의 의식 중 하나다. 올해 심판과 주심의 도움을 받아 동전을 던지는 명예를 차지한 사람은 윌리엄 케인스다. 윌리엄 케인스는 켄트 출신의 일곱 살 소년인데, 두 살에 간암에 걸렸지만 수술과 끔찍한 화학요법을 견디고 아직까지 살아남았다. 소년은 영국암연구소를 대표하는 자격으로 여기에 나왔다. 금발에 분홍빛 뺨을 한 소년은 키가 페더러의 허리쯤 온다. 관중은 명예로운 동전 던지기를 승인하는 우레 같은 환성을 보낸다. 페더러는 내내 막연한 미소를 띄우고 있다. 네트 건너편 나달은 권투선수처럼 팔을 좌우로 흔들면서 제자리에서 계속 뛰고 있다. 미국 방송사들이 동전 던지기를 보여주는지 아닌지, 이 의식이 중계 계약상 의무적으로 방송해야 하는 장면인지 아니면 자르고 광고를 보여줘도 되는 장면인지는 잘 모르겠다. 윌리엄 케인스가 안내를 받아 퇴장할 때도 관중은 좀더 환호를 보낸다. 그러나 이제 환성은 산발적이고 흐트러져 있다. 관중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의식이 끝나니, 이제야 그 아이가 이 경기의 일부가 된 이유가 무엇인지가 사람들의 마음에 이해되기 시작한 것 같다. 암에 걸린 아이가 꿈의 결승전에서 동전을 던진다는 것, 이것은 뭔가 중요한 감정을 일으킨다. 불편하면서도 또 꼭 그렇지만은 않은 어떤 감정을 일으킨다. 그게 정확히 무슨 의미이든, 혀끝에서 맴돌기만 할 뿐 좀처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종류의 그 감정은 최소한 처음 두 세트가 끝날 때까지는 계속 그렇게 종잡을 수 없는 무언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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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운동선수의 아름다움은 직접적으로 묘사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환기시키는 것조차 그렇다. 페더러의 포핸드는 물처럼 흐르는 채찍과 같고, 한 손으로 날리는 백핸드는 스핀 없이 날아갈 수도 있고, 톱스핀을 먹어서 날아갈 수도 있고, 백스핀을 먹어서 슬라이스가 될 수도 있는데, 그 슬라이스는 스냅이 어찌나 강한지 공이 공중에서 형태를 바꾸고는 아마도 발목 높이로 잔디에서 미끄러진다. 그의 서브 속도는 세계 정상급이고, 그 위치와 다양성은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서브를 넣는 움직임은 유연하고 별난 점은 없는데, (TV로 볼 경우) 특징적인 점이라면 공을 때리는 순간에 온몸에 뱀장어처럼 스냅이 들어간다는 것 정도다. 공을 예상하는 능력과 코트 감각은 비현실적인 수준이고, 그의 발놀림은 게임 역사상 최고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어릴 때 축구 신동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중 무엇도 이 선수가 경기하는 모습을 지켜본 경험을, 그의 시합에 담긴 아름다움과 천재성을 직접 목격한 경험을 제대로 설명하거나 환기시키는 것은 없다. 그러니 미적인 것에는 비딱하게 접근하는 수밖에 없다. 에둘러서 말하는 수밖에 없다. 혹은 – 아퀴나스가 자신의 형언할 수 없는 주제에 대해서 그렇게 했듯이 – 그것이 무엇이 아닌가를 말함으로써 그것을 정의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무엇이 아닌가 하면, 일단 텔레비전으로 중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온전히 중계될 수는 없다. TV 테니스는 나름대로 이점이 있지만, 그 이점에는 단점이 따르는데, 그중 제일가는 것은 우리에게 경기를 가깝게 보고 있다는 망상을 안긴다는 점이다. 텔레비전의 슬로모션 재생, 클로즈업과 그래픽, 등등은 시청자들에게 많은 특권을 안기기 때문에, 우리는 방송으로 볼 때 무엇을 놓치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방송에서 놓치는 것 중에서 가장 큰 부분은 일류 테니스의 압도적인 물리적 속성이다. 공이 날아가고 선수들이 반응하는 속도가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 감각이다. 이 손실은 설명하기 쉽다. 점수가 나는 동안 TV가 우선적으로 신경 쓰는 것은 코트 전체를 아울러서 종합적인 그림을 보여주는 것, 그래서 시청자들이 두 선수를 다 보고 공이 오가는 모양새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TV는 한쪽 베이스라인 뒤쪽 상공에서 코트를 바라보는, 거울과도 같은 관점을 취한다. 당신, 즉 시청자는 코트 뒤쪽 상공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것이다. 미술 전공 학생이라면 누구든 쉽게 설명해줄 텐데, 이런 시점은 코트를 “축소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실제 테니스는 누가 뭐래도 3차원이지만 TV 화면의 영상은 결국 2차원일 뿐이다. 화면에서 사라지는 (혹은 왜곡되는) 차원은 실제 코트의 길이, 즉 한쪽 베이스라인에서 다른쪽 베이스라인까지의 78피트 거리이다. 공이 그 거리를 가로지르는 속도가 한 숏의 속도인데, TV에서는 그 속도가 안 보이지만 실제로 보면 그것은 보고 있기가 무서울 만큼 빠른 속도이다. 이 말이 추상적이거나 과장된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그렇다면 부디 아무 프로 시합이나 찾아가서 직접 관람하며 – 특히 바깥 코트에서 진행되는 초반 라운드 경기에서는 사이드라인으로부터 불과 20피트 떨어져 앉아서 관람할 수 있으니 더 좋다 – 차이를 몸소 느껴보길 바란다. 당신이 테니스를 텔레비전으로만 봤다면, 당신은 프로 선수들이 공을 얼마나 세게 때리는지, 공이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 선수들이 공을 받아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 선수들이 얼마나 잽싸게 움직이고 몸을 틀고 공을 때리고 자세를 가다듬는지, 전혀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 로저 페더러보다 더 빠른 사람은 없다. 로저 페더러만큼 기만적일 정도로 아무 애를 쓰지 않고 해내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없다.

흥미로운 점은, 페더러의 지성만큼은 TV 중계에서 덜 가려진다는 것이다. 그의 지성은 각도로 나타날 때가 많기 때문이다. 페더러는 점수를 딸 숏을 넣어야 할 빈틈과 각도를 남들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정도로 잘 보고, 혹은 만들어낸다. 그리고 텔레비전의 시점은 그런 ‘페더러 순간’을 보여주고 재생하기에 완벽하다. 다만 TV로 음미하기가 그보다 좀더 어려운 점은 그런 환상적인 각도와 점수를 따내는 숏이 난데없이 생겨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숏은 몇 숏 앞서서 계획된 것일 때가 많으며, 결정적인 마지막 숏의 속도나 위치 못지않게 그 전에 페더러가 교묘하게 상대의 위치를 조작한 것에 의존할 때가 많다. 그리고 페더러가 어떻게, 어째서 다른 세계 정상급 선수들을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가를 이해하려면, 이번에는 – 혹은 이번에도 – TV가 제공하는 것을 넘어서 현대의 파워 베이스라인 게임을 기술적으로 좀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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윔블던은 이상하다. 그곳이 게임의 메카, 테니스의 대성당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만일 이 토너먼트가 우리에게 자신이 테니스의 대성당임을 거듭해서 상기시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로서는 그곳에 알맞은 수준의 존경심을 품기가 오히려 더 쉬울 것이다. 윔블던은 고리타분한 자기 만족과 쉴 새 없는 자기 PR 및 브랜딩이 기묘하게 뒤섞인 태도를 보여준다. 마치 사무실 벽에 자신이 받은 명판, 수료증, 상장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걸어둔 권위 있는 인물의 태도를 연상시킨다. 우리는 그 사무실에 들어갈 때마다 벽을 보고는 깊은 인상을 받았음을 표현하는 말을 뭐라도 건네야만 할 것처럼 느낀다. 윔블던의 벽에는, 거의 모든 중요한 복도나 통로를 따라, 포스터들과 과거 챔피온들의 숏을 보여주는 안내문들, 윔블던에 관한 중요하거나 사소한 사실들의 목록, 전해지는 이야기 등이 붙어 있다. 개중 어떤 것은 흥미롭고 어떤 것은 그냥 이상하다. 예를 들어, 윔블던 잔디 테니스 박물관에는 수십 년 동안 이곳에서 사용된 온갖 종류의 라켓들이 수집되어 있다. 그리고 밀레니엄 빌딩의 2층 통로에 붙어 있는 많은 안내문들 중에는 일종의 ‘라켓의 역사’라 할 만한 이야기를 사진과 설교적인 텍스트로 알려주는 것이 있다. 다음은 그 텍스트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끝부분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래파이트, 붕소, 티타늄, 세라믹 같은 우주시대의 재료로 만들어졌고 머리가 더 큰 – 중형(90-95제곱인치)과 대형(110제곱인치)이 있다 – 오늘날의 초경량 라켓 프레임은 게임의 성격을 완전히 혁신시켰다. 오늘날 게임을 지배하는 선수들은 강력한 톱스핀을 가진 강한 선수들이다. 서브 앤드 발리가 특기인 선수들, 섬세함과 터치에 의존하는 선수들은 사실상 다 사라지고 말았다.”

아무리 좋게 해석하려고 해도 참 이상한 일이다. 페더러가 윔블던을 4년째 제패하고 있는데도 저런 진단이 버젓이 계속 걸려 있다니. 왜냐하면 이 스위스인은 (최소한) 매켄로의 전성기 이래 찾아볼 수 없었던 수준의 터치와 섬세함을 남자 테니스에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안내문은 사실 독단적 교리의 힘을 보여주는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20년 가까이 테니스계의 기본 교리는 라켓 기술, 훈련, 웨이트 트레이닝의 발전이 프로 테니스를 민첩함과 기교의 게임으로부터 운동선수다운 기량과 순전한 힘의 게임으로 바꿔놓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파워 베이스라인 게임이 생겨난 원인을 밝힌 해석으로서 이런 교리는 대체로 정확하다. 오늘날의 프로 선수들은 정말로 측정 가능할 만큼 더 크고, 더 강하고, 더 잘 훈련되어 있다. 그리고 최첨단 합성 재료 라켓은 정말로 속도와 스핀을 향상시켜주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로저 페더러처럼 고도의 기교를 자랑하는 선수가 남자 단식을 제패하게 된 현실은 이 교리에 크나큰 혼란을 안기는 일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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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더러의 득세에 대한 유효한 설명으로는 세 종류가 있다. 그중 하나는 미스터리와 형이상학을 끌어들인 설명인데, 나는 이것이 진실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다. 다른 두 가지는 좀더 기술적이고, 좀더 좋은 저널리즘에 가깝다.

형이상학적 설명이란 로저 페더러가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특정 물리 법칙에서 면제된 것처럼 보이는 희귀하고도 초자연적인 선수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좋은 비유 대상은 마이클 조던이다. 그는 비인간적으로 높이 점프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중력이 허락하는 것보다 실제로 한두 박자 더 오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무하마드 알리는 권투 경기장 바닥으로부터 실제로 “떠올랐을” 뿐 아니라 시계로는 잽을 한 번 날릴 수 있는 시간에 두세 번을 날릴 수 있는 것 같았다. 1960년 이래 이런 사례가 아마도 대여섯 명쯤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로저 페더러는 바로 이런 종류의 선수이다. 우리가 천재, 혹은 돌연변이, 혹은 화신이라고 부를 만한 선수. 페더러는 결코 서두르거나 균형을 잃지 않는다. 그를 향해 다가오는 공은 실제 그래야 하는 것보다 몇 분의 일 초쯤 더 오래 공중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그의 움직임은 운동선수답게 강하다기보다는 나긋나긋하다. 알리, 조던, 마라도나, 그레츠키처럼, 그는 상대하는 선수들보다 덜 실체적인 동시에 더 실체적인 것처럼 보인다. 특히 윔블던이 필수 조건으로 요구하면서도 살짝 어기는 것도 흔쾌히 용인하는 복장 규정, 즉 흰옷만 입었을 때 그는 (내가 생각하는) 실체와 아주 가까운 존재처럼 보인다. 육신이 육체이면서도 동시에 어째서인지 빛이기도 한 존재로.

공이 마치 이 스위스인의 의지에 굴복하는 것처럼 협조적으로 느려져서 공중에 오래 걸려 있다는 것, 이런 이야기에는 모종의 형이상학적 진실이 담겨 있다. 그리고 다음 일화를 들어보라. 7월 7일 준결승전에서 페더러가 요나스 비에르크만을 완파한 뒤, – 그냥 이긴 게 아니라 완전히 밟아버렸다 – 시합 후 필수적으로 하게 되어 있는 기자 회견이 열리기 직전에, 페더러와 사이가 좋은 비에르크만은 자신이 “경기장에서 제일 좋은 좌석에서” 이 스위스인이 “인간이 가능한 한 완벽에 가까운 테니스를 치는 것을” 구경할 수 있어서 기뻤다고 말했다. 페더러와 비에르크만은 그냥 잡담 삼아 농담하는 것이었는데, 그러던 중 비에르크만은 페더러에게 코트에서 공이 얼마나 비현실적으로 커 보이더냐고 물었고, 페더러는 정말로 “꼭 볼링공이나 농구공처럼” 보이더라고 대답했다. 페더러는 비에르크만의 기분을 낫게 만들려고 농담처럼 겸손하게 말한 것이었다. 자신도 그날 유달리 경기를 잘한 것이 놀랍다는 투로 말이다. 하지만 그는 또한 테니스가 자신에게 어떻게 느껴지는지에 대해서 약간의 정보를 발설한 것이었다. 당신이 초자연적일 만큼 뛰어난 반사신경과 신체 조화 능력과 속도를 갖추고 최고 수준의 테니스를 치는 사람이라고 상상해보라. 그때 당신이 경기 중에 느끼는 것은 자신이 경이적인 반사신경과 속도를 가졌구나 하는 느낌이 아닐 것이다. 그보다 당신에게는 테니스공이 꽤 크고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것이고, 당신에게는 늘 그것을 맞출 시간이 충분한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즉, 당신이 경험하는 것은 테니스공이 너무 빠른 나머지 쉭쉭 소리를 내고 흐릿하게 보이는 것을 목격하는 현장의 관중이 당신에게 부여하는 (경험적으로는 실존하는) 민첩함과 기술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속도는 한 부분일 뿐이다. 그다음부터는 더 전문적이다. 테니스는 흔히 인치의 게임이라고 불리지만, 이 진부한 표현은 대체로 숏이 떨어지는 지점에 관해서만 적용된다. 선수가 날아오는 공을 때리는 순간에 관해서라면, 테니스는 그보다는 마이크로미터의 게임에 가깝다. 공을 때리는 순간 근처에서 한없이 작은 변화만 있더라도 공이 어디로 어떻게 날아갈 것인가에는 큰 영향을 미친다. 라이플을 아주 조금만 부정확하게 겨냥하더라도 멀리 있는 표적을 놓칠 수 있는 것 역시 같은 원리이다.

설명을 돕기 위해서, 모든 것이 좀더 느리게 흘러가도록 만들어보자. 테니스 선수인 당신이 당신의 오른쪽 코트 베이스라인 바로 뒤에 서 있다고 상상하자. 상대가 서브한 공이 당신의 포핸드 지점으로 날아온다. 당신은 몸을 회전하여 공이 들어오는 경로로 몸의 측면을 정렬하고, 포핸드로 받아 넘기기 위해서 라켓을 뒤로 가져가기 시작한다. 머릿속의 상상을 이어가서, 당신이 라켓을 앞으로 움직이는 행동을 절반까지 했다고 하자. 날아드는 공은 이제 당신의 엉덩이 바로 앞까지, 공을 때릴 지점으로부터 아마 6인치쯤 떨어진 곳까지 와 있다. 이때 개입되는 변수 몇 가지만 따져보자. 수직면을 보자면, 라켓 앞면을 몇 도만 앞으로 혹은 뒤로 기울이느냐에 따라 톱스핀이냐 백스핀이냐가 결정된다. 그냥 수직으로 두면 스핀이 없는 평평한 드라이브가 만들어질 것이다. 수평면을 보자면, 라켓 앞면을 아주 약간만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돌리느냐에 따라, 그리고 공을 몇 밀리초쯤 더 일찍 혹은 더 늦게 때리느냐에 따라 공이 대각선으로 넘어가느냐 사이드라인에 떨어지느냐가 결정될 것이다. 게다가 그라운드스트로크의 움직임과 폴로스루의 곡선을 약간만 변화시키면 받아 친 공이 네트를 얼마나 높이 날 것인가가 결정되는데, 여기에 당신의 스윙 속도가 결합하여 공이 상대의 코트에서 얼마나 깊게 혹은 얕게 떨어질지, 얼마나 높이 튀어오를지, 등등이 결정될 것이다. 이것은 물론 가장 폭넓게만 구별한 정도이다. 실제로는 가령 강한 톱스핀 대 가벼운 톱스핀, 날카로운 대각선 넘기기 대 약간만 대각선으로 넘기기, 등등이 있다. 또한 당신이 공을 몸에 얼마나 가깝게 붙이느냐, 어떤 그립으로 라켓을 쥐느냐, 무릎을 얼마나 굽히느냐, 몸무게를 얼마나 앞으로 쏟느냐, 공을 보면서 상대가 서브 후에 무엇을 하는지도 동시에 볼 수 있느냐, 등등의 문제도 있다. 이런 것도 모두 중요하다. 더구나 지금 당신은 가만히 있던 물체를 움직이게 만드는 게 아니라 당신을 향해 날아오던 물체의 비행과 (다양한 수준의) 스핀을 되돌려주는 것이라는 사실도 있다. 프로 테니스의 경우, 날아오는 공의 속도는 의식적인 생각을 하는 게 불가능한 수준이다. 예를 들어 마리오 안치치의 첫 번째 서브는 시속 130마일쯤 된다. 안치치의 베이스라인에서 당신의 베이스라인까지 거리가 78피트이니, 그의 서브가 당신에게 도달하기까지 0.41초가 걸린다는 말이다. 이것은 눈을 빠르게 두 번 깜박이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도 짧다.

요컨대, 프로 테니스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시간 간격은 의식적 행동을 하기에는 너무 짧다. 시간적으로 우리는 그보다는 반사신경의 활동 범위에 들어 있는 셈이다. 의식적 사고를 건너뛴 채 순전히 육체적으로만 벌어지는 반응 말이다. 그러나 서브를 효과적으로 받아 넘기는 것은 무수한 결정들과 육체적 조정들에 의지하는 일이고, 그런 것은 단순히 놀라면 눈을 깜박거리면서 펄쩍 뛴다거나 하는 행동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이 관여하는 의도적인 행동이다.

강한 서브로 넘어온 테니스공을 성공적으로 받아 넘기는 데는 이른바 “운동감각”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복잡하게 얽힌 작업들을 아주 재빠르게 수행함으로써 육체와 그 인공적 연장을 잘 통제해내는 능력을 뜻한다. 영어에는 이 능력의 다양한 측면을 뜻하는 용어가 한 무더기는 된다. 느낌, 터치, 기량, 자기 수용 감각, 신체 조화 능력, 손-눈 조화 능력, 근육 감각, 우아함, 통제력, 반사신경, 등등. 유망한 주니어 선수들에게는 이 운동감각을 다듬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매일 실시한다고들 하는 극단적으로 힘든 연습 일과를 수행하는 주목적이다. 이때 훈련은 근육적인 것이기도 하고 신경학적인 것이기도 하다. 매일매일 수천 번씩 스트로크를 연습하다 보면, 보통의 의식적인 생각으로는 해낼 수 없는 것을 “느낌”으로 해낼 수 있는 능력이 발달한다. 외부인이 보기에는 이런 반복 연습이 지루하거나 심지어 잔인해 보이겠지만, 외부인은 선수의 몸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결코 느끼지 못한다. 미세한 조정이 벌어지고 또 벌어지며, 각각의 변화가 주는 효과에 대한 감각은 그것이 보통의 의식에서 멀어지더라도 점점 더 예리해진다.

운동감각 훈련을 진지하게 수행하는 데 드는 시간과 노력은 보통 (아주 늦어도) 십 대 초반부터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테니스에만 바친 사람들만이 일류 프로 선수가 될 수 있는 한 이유이다. 예를 들어, 로저 페더러가 끝내 축구를 포기하고, 어린 시절다운 어린 시절을 포기하고, 에쿠블렌스에 있는 스위스 국가 테니스 훈련 센터에 들어간 것은 그가 열세 살 때였다. 열여섯 살에 그는 학교 수업을 그만두고 진지하게 국제 경기에 출전하기 시작했다.

페더러가 주니어 윔블던에서 우승한 것은 학교를 그만둔 지 불과 몇 주 뒤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테니스에 헌신한 주니어 선수라고 해서 누구나 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역시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다면 시간과 훈련 외에 다른 것도 관여하는 셈이다. 순전한 재능이라는 것도 있고, 그것도 여러 단계로 있다. 오랫동안 연습하고 훈련하는 게 가치가 있으려면 아이에게 애초에 특출한 (그리고 측정 가능한) 운동감각 능력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출발점으로부터, 시간이 흐르면, 낭중지추처럼 가장 뛰어난 재능이 두드러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페더러의 지배를 기술적으로 설명하는 한 가지 해석은 그가 다른 남자 프로 선수들보다 그런 운동감각적 재능이 좀더 뛰어나다는 것이다. 다만 아주 약간만. 왜냐하면 세계 랭킹 100위에 드는 선수라면 누구나 운동감각적 재능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테니스는 인치의 게임이다.

이 대답은 그럴듯하지만 완전하지는 않다. 1980년이라면 완전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2006년에는 왜 여태까지 이런 종류의 재능이 중요한가 하고 되물어보는 것이 타당하다. 테니스계의 독단적 교리와 윔블던의 안내문을 다시 떠올려보라. 운동감각 면에서의 거장이든 아니든, 현재 로저 페더러는 역사상 존재했던 선수들 중 가장 크고, 강하고, 튼튼하고, 가장 훌륭한 훈련과 코치를 받는 남자 프로 선수들을 제압하고 있다. 그들 모두가 파괴적인 라켓을 쓰고 있고, 그 라켓은 섬세한 운동감각적 기량을 무의미하게 만든다고 일컬어지는데 말이다. 마치 메탈리카의 공연장에서 모차르트를 휘파람으로 불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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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만한 자료에 따르면, 명예로운 동전 던지기에 나섰던 윌리엄 케인스의 사연은 이렇다. 어느 날, 그가 두 살 반이었을 때,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배에서 덩어리를 발견했고, 그래서 그를 의사에게 데려갔으며, 덩어리는 악성 간 종양으로 진단되었다. 그 시점에서는 물론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그만 아이가 화학요법을 견디고, 더 심한 화학요법을 견디고, 그의 어머니는 그 장면을 지켜보고, 아이를 집으로 데려왔다가, 간호하고, 화학요법을 더 받기 위해서 다시 그곳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것을. 어머니는 아이의 질문에 어떻게 답했을까? 큰 질문, 명백한 질문에? 그리고 그녀의 질문에는 누가 답할 수 있었을까? 그 어떤 사제나 목사라도 과연 그로테스크하지 않은 대답을 해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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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전 2세트는 나달이 2-1로 이기고 있고, 역시 그가 서브를 넣고 있다. 페더러는 1세트를 러브 게임으로 땄지만, 가끔 그러듯이 그 뒤에 약간 기운이 빠져서 이제 브레이크 포인트가 하나 뒤진 상황에 몰렸다. 나달의 어드밴티지인 지금, 16번의 스트로크가 이어진 뒤 점수가 날 것이다. 나달이 파리에서보다 시속 20마일 더 빠른 속도로 서브를 넣고, 이 공은 중앙에 떨어진다. 페더러는 부드러운 포핸드로 공을 네트 높이 띄우는데, 그가 이렇게 해도 괜찮은 것은 나달이 서브 뒤에 안으로 들어오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 스페인 선수는 이제 특징적인 강한 톱스핀을 먹인 포핸드로 공을 페더러의 백핸드 깊숙이 찔러 넣는다. 페더러는 백핸드로 그보다 더 강한 톱스핀을 먹여 넘기는데, 거의 클레이 코트 슛 수준이다. 이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슛이라서 나달은 약간 뒤로 물러나는데, 그러면서 그가 낮고 강하게 넘긴 짧은 공은 페더러의 포핸드 쪽 서비스라인의 T 지점을 살짝 지나쳐 떨어진다. 대부분의 다른 상대에 대해서라면 페더러는 이런 공으로 간단히 점수를 딸 수 있겠지만, 나달이 페더러에게 골칫거리인 한 이유는 나달이 다른 선수들보다 빨라서 다른 선수들은 받지 못하는 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페더러는 여기에서 그냥 포핸드로 스핀을 먹이지 않은 중간 세기의 공을 대각선으로 날린다. 점수를 딸 요량이 아니라, 낮고 얕은 각도로 떨어지는 공으로 나달을 오른쪽 코트 멀리까지, 백핸드 지점으로 끌어내려는 것이다. 나달은 달려가면서 백핸드로 강하게 받아 쳐, 공을 페더러의 백핸드 지점 라인에 떨어뜨린다. 페더러는 그 공에 백스핀을 먹여서 똑같은 방향으로 돌려 보냄으로써 공이 느리고 높게 뜨게 만들어, 나달이 똑같은 지점으로 돌아가게끔 만든다. 나달이 바로 공을 백스핀으로 받아 넘기고 – 이제 연속 세 숏이 똑같은 선으로 오갔다 – 페더러는 이번에도 똑같은 지점으로 백스핀으로 받아 넘기는데, 이번 공은 아까보다 더 느리고 더 높이 떠서, 나달은 그곳에 자리를 잡은 채 똑같은 방향으로 두 손으로 받아 넘긴다. 나달은 자신의 코트 오른쪽으로 멀리 나가서 아예 진을 친 것 같다. 그는 더 이상 숏 사이에 베이스라인 중앙으로 끝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페더러가 그에게 약간 최면을 건 것이다. 페더러는 이제 아주 강하고 깊게 톱스핀을 먹인 공을 백핸드로 넘긴다. 쉿 소리가 날 것 같은 종류의 공이다. 공은 나달의 베이스라인에서 약간 왼쪽으로 치우친 지점으로 들어가고, 나달은 그것을 받아서 포핸드로 대각선으로 넘긴다. 그리고 페더러는 좀더 강하고 묵직한 공을 백핸드로 대각선으로 받아 넘기는데, 아주 빠르게 베이스라인 깊이 들어간 그 공을 받기 위해서 나달은 불리한 상황에서 포핸드로 넘기고는 서둘러 중앙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숏은 다시 한 번 페더러의 백핸드 쪽으로 아마도 2피트쯤 짧게 떨어진다. 로저 페더러는 이 공으로 다가가면서, 아까와는 전혀 다르게 백핸드로 대각선으로 받아 넘기는데, 이 숏은 훨씬 더 짧은 데다가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예리한 각도이며, 톱스핀이 워낙 강하게 먹여져 있어서 사이드라인 바로 안쪽에 얕게 떨어진 뒤 세게 튀어나가 버린다. 나달은 그것을 중간에 차단할 수 없고 베이스라인을 따라 측면으로 움직여서 받아낼 수도 없다. 각도와 톱스핀 때문이다. 이것으로 페더러 득점. 이것은 눈부신 득점 숏이자 또 한 번의 ‘페더러 순간’이다. 그러나 이 장면을 현장에서 본 사람이라면, 이 득점 숏은 페더러가 네 숏, 심지어 다섯 숏 앞에서부터 계획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처음에 사이드라인에 걸쳤던 슬라이스 이후 모든 것은 이 스위스인이 나달을 조종하여 꾀어내고 그의 리듬과 균형을 망가뜨림으로써 최후의 상상 불가능한 각도를 열어내기 위한 작전이었다. 그리고 그 각도는 엄청난 톱스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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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인 톱스핀은 오늘날의 파워 베이스라인 게임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이것은 윔블던의 안내문이 옳게 말한 지점이다. 하지만 톱스핀이 왜 그렇게 결정적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 널리 이해되지 않았다. 반면에 사람들이 널리 이해하고 있는 사실은, 최첨단 합성 소재 라켓이 공에 훨씬 더 큰 속도를 내준다는 것이다. 구식의 나무로 된 야구 배트보다 알루미늄 배트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교리는 거짓이다. 진실은 무엇인가 하면, 같은 인장력일 때 탄소 합성 소재는 나무보다 더 가볍기 때문에 현대의 라켓은 크레이머나 맥스플라이 같은 빈티지 라켓보다 몇 온스 더 가벼울 수 있고 폭도 최소한 일 인치 더 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것은 바로 이 머리의 폭이다. 폭이 넓다는 것은 실이 얽힌 영역이 더 넓다는 뜻이고, 그것은 곧 스위트 스폿이 더 크다는 뜻이다. 합성 라켓을 쓰면, 공에 속도를 가하기 위해서 꼭 기하학적으로 정확한 한중간에 공을 맞힐 필요가 없다. 톱스핀을 가할 때도 꼭 정확한 지점에 맞힐 필요가 없다. 톱스핀을 가하려면 (기억하겠지만) 라켓을 기울인 채 위로 곡선을 그리면서 스트로크를 해야 하는데, 이것은 공을 라켓에 정면으로 맞추는 것이라기보다는 쓸어내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이것은 나무 라켓으로 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라켓의 면이 작아서 스위트 스폿이 인색하리만치 좁기 때문이다. 합성 라켓은 머리가 더 가볍고 넓어서 중심이 더 넓으니, 선수는 더 빠르게 스윙하면서도 공에 더 많은 톱스핀을 가할 수 있다… 그리고 공에 톱스핀을 더 많이 가할수록 공을 때리기가 더 어려워지는데, 왜냐하면 오차 범위가 더 넓어지기 때문이다. 톱스핀을 먹인 공은 네트 위를 높게 날아가고, 예리한 호를 그리며, (그냥 치솟아서 나가버리는 게 아니라) 상대의 코트 안쪽으로 빠르게 뚝 떨어진다.

그러니 여기에서 기본 공식은 합성 라켓이 톱스핀을 가능하게 해주고, 톱스핀은 20년 전에 비해 그라운드스트로크를 훨씬 더 빠르고 강력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요즘은 남자 프로 선수들이 스트로크의 힘 때문에 땅에서 떨어져서 공중으로 뜨다시피 하는 모습을 보는 게 흔한 일이 되었다. 과거에는 지미 코너스에게서만 볼 수 있었던 장면이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코너스가 파워 베이스라인 게임의 아버지였는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가 베이스라인에서 강력하게 때리는 경기를 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의 그라운드스트로크는 스핀이 없었고 네트를 아주 낮게 넘어갔다. 비외른 보리는 파워 베이스라인 선수였는가 하면, 그도 아니었다. 보리와 코너스는 둘 다 고전적인 베이스라인 게임의 좀더 특수한 형태를 따랐다고 할 수 있었고, 그 고전적인 베이스라인 게임이란 그보다 더 고전적인 서브 앤드 발리 게임에 대항하기 위해서 진화한 것이었다. 그 서브 앤드 발리 게임은 수십 년 동안 남자 테니스계를 지배한 게임 형태였으며, 현대에 그 게임의 가장 위대한 선수는 존 매켄로였다. 당신도 아마 이런 이야기를 다 알 것이다. 매켄로가 보리를 거꾸러뜨리고는 남자 단식을 지배하다시피 했다는 것을, 그러나 그 시대는 1980년대 초중반에 끝났는데 왜냐하면 이때 (a) 현대적인 합성 라켓이 등장했고 (b) 최초의 합성 라켓을 사용한 선수이자 파워 베이스라인 테니스의 진정한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이반 렌들이 나타났다는 것을.

이반 렌들은 그 스트로크와 전략이 합성 라켓의 특수한 능력에 어울리도록 설계된 것처럼 보이는 최초의 일류 프로 선수였다. 그의 목표는 베이스라인에서 숏을 받아 넘기거나 바로 점수 숏을 꽂거나 해서 점수를 따는 것이었다. 그의 무기는 그라운드스트로크, 특히 포핸드였는데, 그것을 그는 압도적인 속도로 칠 수 있었다. 공에 엄청난 톱스핀을 먹였기 때문이다. 속도와 톱스핀의 조합 덕분에 렌들은 또한 파워 베이스라인 게임의 등장에 결정적인 요소였음이 증명된 무언가를 더 할 수 있었다. 바로 강하게 때린 그라운드스트로크로 극단적이고 놀라운 각도를 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로 빠른 속도 덕분에 강한 톱스핀이 공을 멀리 벗어나지 않고 뚝 떨어지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이것이야말로 공격적인 테니스의 물리학을 완전히 바꿔놓은 사건이었다. 수십 년 동안 서브 앤드 발리 게임이 그토록 큰 위력을 발휘했던 것은 바로 이 각도 때문이었다. 선수가 네트에 가까울수록 상대의 코트가 더 많이 열렸다. 발리의 고전적인 이점은 베이스라인이나 코트 중간에서 시도했다면 공이 멀찌감치 벗어날지도 모르는 각도로 때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라운드스트로크에 먹인 톱스핀은, 정말로 심하게 먹인 경우라면, 공이 빠르고 얕게 떨어지도록 해주기 때문에 발리에서 쓰는 것과 똑같은 각도들을 많이 쓸 수 있게 해준다. 당신이 때리는 그라운드스트로크가 다소 짧은 공이라면 특히 더 그렇다. 공이 짧을수록 더 많은 각도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속도, 톱스핀, 공격적인 베이스라인 각도. 보라, 바로 이것이 파워 베이스라인 게임이다.

이반 렌들이 불멸의 위대한 테니스 선수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그저 강한 톱스핀과 완력으로 베이스라인에서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를 처음으로 보여준 세계적 수준의 프로 선수였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합성 라켓과 마찬가지로 그의 성취는 복제 가능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육체적 재능과 훈련이 일정 문턱을 넘어서면, 그다음에 필요한 조건은 주로 운동선수다운 태도, 공격성, 탁월한 힘, 그리고 조건화였다. 그 결과가 바로 (다양하고 복잡한 세부들과 하부 전문 분야들은 제외한 말이지만) 지난 20년 동안의 남자 프로 테니스였다. 갈수록 더 크고, 더 강하고, 더 튼튼한 선수들이 나타나서 유례 없는 속도와 톱스핀으로 땅을 때림으로써 자신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짧은 공이나 약한 공을 끌어내려고 노력하는 것.

좋은 사례가 되어주는 통계가 하나 있다. 2002년 윔블던 남자 결승전에서 레이턴 휴잇이 데이비드 날반디안을 꺾었을 때, 경기를 통틀어 서브 앤드 발리로 딴 점수는 단 한 점도 없었다.

파워 베이스라인 게임은 일반적으로 지루하지 않다. 구식의 서브 앤드 발리 게임이나 까마득히 높게 띄운 지루한 공이 난무하는 고전적 베이스라인 소모전보다야 확실히 덜 지루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뭔가 정적이고 제한적인 면이 있다. 오랫동안 전문가들이 공개적으로 두려워해온 것과는 달리, 파워 베이스라인 게임은 테니스의 진화적 종착점이 아니다. 이 사실을 보여준 선수가 바로 로저 페더러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현대적 게임의 내부에서 보여주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내부에서라는 대목이다. 이것은 순전히 신경학적인 설명이 간과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것은 터치나 섬세함 같은 섹시한 설명을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페더러에게 있어서, 이것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이 스위스인은 렌들과 아가시의 그라운드스트로크가 보여주는 속도를 고스란히 갖고 있고, 스윙할 때 강력하게 땅을 박차며, 백코트에서 나달조차 놓치게 만드는 숏을 때릴 수 있다. 그렇다면 윔블던의 안내문에서 정말로 이상하고 잘못된 점은 그 개탄하는 듯한 어조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2006년도 여전히, 파워 베이스라인의 전성기이기 때문이다. 로저 페더러는 일류의, 무지막지하게 강력한, 파워 베이스라인 선수이다. 다만 그는 오로지 그것만은 아닐 뿐이다. 그에 더해서 그에게는 지성이 있고, 오컬트로 느껴질 만큼 공에 잘 대비하는 능력, 코트 감각, 상대를 읽고 조종하는 능력, 스핀과 속도를 섞는 능력, 엉뚱한 방향으로 보내고 가장하는 능력, 그냥 속도에만 의존하기보다는 전략적 선견지명과 주변시야와 폭넓은 운동감각적 범위를 활용하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요소들은 오늘날의 남자 테니스가 가진 한계와 가능성을 노출해 보여준다.

…이런 말이 대단히 과장되고 좋게 말한 이야기처럼 들린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 남자에 대해서라면 이것이 과장된 말도, 추상적인 말도 아니라는 것을 부디 이해해주길 바란다. 좋게 말한 이야기도 아니다. 렌들이 자신의 교훈을 단호하게, 경험적으로, 압도적으로 보여주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로저 페더러는 오늘날 프로 게임의 속도와 힘이 게임의 뼈대일 뿐 온전한 육체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비유적으로나 문자 그대로나 남자 테니스를 새롭게 구현해내고 있으며,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처음으로 이 게임의 미래는 예측 불가능하게 되었다. 여러분도 윔블던의 바깥 코트에서 올해 주니어 윔블던 경기가 마치 다종다양한 발레처럼 펼쳐지는 모습을 보았어야 한다. 드롭 발리와 혼합 스핀, 일부러 느리게 넣은 서브, 세 숏 앞을 내다본 수 – 이런 것들이 표준적인 요소인 신음 소리와 고속으로 날아가는 공과 함께 펼쳐졌다. 이곳의 주니어 선수들 가운데 햇병아리 페더러와 같은 재목이 있는지 없는지는 물론 알 수 없다. 천재성은 복제되지 않는다. 하지만 영감은 전염되며, 그것도 여러 형태로 전염된다. 그리고 힘과 공격성이 아름다움 앞에서 취약해지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영감을 느끼고 (필멸하는 인간의 덧없는 방식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DF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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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뉴욕 타임스>에 ‘종교적 경험으로서의 페더러’라는 제목으로 실렸던 에세이다. 기사 링크는 여기.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유작 에세이집 ‘Both Flesh And Not’에 실리면서 제목이 ‘Federer Both Flesh And Not’으로 바뀌었다. 유작 에세이집의 대표 에세이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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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thought on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 Federer Both Flesh And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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