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더 무브 – 올리버 색스 자서전

온 더 무브
올리버 색스 지음, 이민아 옮김 / 알마

올리버 색스가 어떤 사람이고 이 자서전에 어떤 이야기가 담겼는지는 그동안 많은 신문 서평이 소상하게 이야기했으니 나는 생략하겠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엄두가 안 나서 쓸 수가 없다. 신경학을 전공한 임상의였으나 생애 대부분의 기간에 고정된 직위 없이 떠돌며 주로 환자들과 자신이 겪은 의학적 경험에 관해 글을 썼던 사람. 우리말로 번역된 것만 열 권이 넘는 책을 남긴 저자. 리투아니아계 유대인 집안에서 자란 영국인이지만 미국에서 살았고, 동성애자로서 평생 성 정체성 문제를 버겁게 느끼다가 죽기 얼마 전에 발표한 이 자서전에서야 성적 지향을 공개적으로 밝힌 사람. 의학뿐 아니라 화학과 다른 과학에도, 문학에도, 음악에도 조예가 있었으며 언뜻 그와 어울리지 않게도 젊은 시절의 취미는 모터사이클과 역도였던 사람. 이것 봐, 요점만 얘기해도 한없이 길어진다니까…

그가 어떤 글을 쓰는 작가였는지는 백 마디 설명보다도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읽어보라고 권하는 게 빠를 것이다. 특이한 신경학적 문제를 가진 환자들의 병례 연구라 할 수 있는 이 책은 환자를 질병으로 환원하지 않고 한 인간으로서 존재 전체를 탐구하려 한 색스의 접근법이 잘 드러난 대표작이다.

색스가 자기 이야기를 주로 한 책 중에서는 <마음의 눈>이나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를 읽으면 좋을 것이다. <마음의 눈>은 그가 암으로 한쪽 눈의 시력을 잃으면서 겪은 여러 환각과 착시 현상을 기록하는 동시에 그 밖의 별난 시각적 장애를 앓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한 책이다.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는 그가 혼자 등산하다가 추락하여 한쪽 다리가 산산조각 나는 경험을 한 뒤 사고와 수술, 회복, 재활 과정에서 겪었던 희한한 신경학적 체험을 기록한 책이다.

***

예전에 나는 ‘남들은 평생 한 번도 못 겪을 (의학적으로 흥미로운) 경험을 색스는 왜 이렇게 많이 겪었지?’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의사 겸 작가 겸 기록광으로서 아무리 사소한 체험이라도 꼬치꼬치 적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는 생활인으로서는 적잖이 골치 아팠겠으나 작가로서 소재 확보 측면에서는 축복받은 인간이 아니었나 하는 못된 생각을 했다.

그런 놀라움은 <온 더 무브>를 읽고 싹 사라졌다. 알고 보면 색스의 파란만장한 삶에서 그 정도의 사건 사고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모든 글에서 자신의 주관적 시선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사람이라 그동안의 모든 책이 일종의 자서전이었지만, 거기 담았던 이야기보다도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색스의 책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흩어진 퍼즐 조각들이 하나로 꿰어 맞춰지며 더 큰 그림이 떠오르는 상쾌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색스를 읽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무엇이 되었든 그의 책을 하나 더 읽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될 것이다.

***

색스의 다른 책에는 어렴풋하게만 나왔으나 <온 더 무브>에서 비로소 또렷하게 이야기된 주제는 글쓰기에 관한 열정이다. 그가 십여 권의 책을 왜, 어떤 계기로, 어떻게, 누구와 함께 썼고 출간했는지가 자세히 나와 있다.

그가 교류했던 많은 사람들과의 재미난 일화도 처음 이야기된 게 많다. 신경심리학자 A. R. 루리야, 고생물학자 스티븐 J. 굴드, 생물학자 프랜시스 크릭, 신경학자 제럴드 에덜먼 등 이름난 과학자들과의 일화가 나온다. 그뿐 아니라 배우 로빈 윌리엄스와 로버트 드니로, 작곡가 마이클 니먼, 작가 해럴드 핀터, 시인 W. H. 오든, <뉴욕 리뷰 오브 북스>의 전설적 편집장 로버트 실버스와의 인연도 무척 재미있다.

무엇보다 뭉클한 것은 색스가 70대가 되어서 만난 마지막 연인 빌 헤이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전 35년 동안 섹스 없는 삶을 살았다는 색스는 한눈이 멀고 좌골신경통으로 끔찍한 수술을 받고 (당시에는 몰랐겠지만) 인생이 십 년도 채 안 남은 울적한 말년에 느닷없이 빌과 연인이 된다. <온 더 무브>는 그 빌에게 바쳐진 책이다. 책을 읽는 나까지 행복했다. (여담이지만, 빌 헤이스는 <해부학자>, <5리터> 등 훌륭한 과학책을 쓴 작가이다. 둘을 이어준 인연이었다는 <해부학자>는 정말정말 재미있고 나도 너무너무 좋아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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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스는 평생 1,000권이 넘는 일기를 썼다고 한다. 친척, 친구, 환자와 무수한 편지를 주고받았고 자신이 보낸 편지도 사본으로 만들어 모조리 보관했다. 그래서인지 자서전은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색스는 자신을 윤색하고 싶은 유혹을 잘 이겨냈는데, 거기에는 다른 해석을 허락하지 않는 엄연한 기록 증거가 한몫했을 것이다.

물론 그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 자서전만 보아서는 그를 둘러싼 세상의 평가를 알기 힘든 면도 있다. 창피한 일화도 자조와 유머를 담아 서슴없이 말할 만큼 소탈하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보수적이고 점잖은 사람이라, 약간은 억제되어 있다. 그러나 읽으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자서전을 다시 만나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아니, 요즘 시대에 이런 자서전이 가능하기는 할까?

올리버 색스는 이 자서전을 탈고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암이 재발했음을 알게 된다. 전이암은 불치의 것이었고, 그는 몇 개월 뒤에 죽었다. 그는 발병 사실을 알기 전에 자서전을 마무리한 것이 다행스럽다고 말했다.

그러니 이것은 죽어가는 사람의 회고가 아니다. 언제까지나 더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의 이야기, 회한도 미련도 없이 한 단계를 정리하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후 죽음을 자연스럽고 의연하게 받아들인 색스의 태도는 많은 사람에게 귀감으로 비쳤으며, 덕분에 이 책은 안팎으로 아름다운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삶은, 만일 그가 글로 기록하여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다면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을지도 모르는 수많은 환자들의 삶과 언제까지나 함께 기억될 것이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니, 작가란 정말 대단한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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