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ature of the Fun – David Foster Wallace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1998년 에세이 ‘The Nature of the Fun 재미의 속성’을 번역해보았다. 2012년 출간된 에세이집 <Both Flesh And Not>에 수록되어 있는 글이다.

***

내가 아는 한, 픽션 작가가 된다는 것에 관하여 가장 훌륭한 비유는 돈 드릴로의 <마오 II>에 나온다. 그 책에서 드릴로는 한창 집필 중인 책을 가리켜 늘 작가를 쫓아다니는 추악한 기형의 아기로 묘사했다. 아기는 언제나 작가를 따라 기어다니는데(이를테면 작가가 식사를 하려고 찾은 식당에서 바닥을 질질 기며 나타난다거나, 아침에 침대 발치에서 그날 제일 처음 나타나는 얼굴이라거나, 등등), 추악한 기형이고, 뇌수종이 있고, 코가 없고, 팔도 뭉툭하고, 대소변을 못 가리고, 지능이 지체되었고, 입에서는 뇌척수액을 질질 흘리면서, 작가를 향해 앵앵거리고 우물우물거리고 울어댄다. 그러면서 사랑을 갈구한다. 그 추악함 때문에 틀림없이 얻어낼 것이 분명한 무언가를 원한다. 바로 작가의 온전한 관심을.

기형의 아기 비유는 완벽하다. 왜냐하면 픽션 작가가 자신이 작업하는 것에 대하여 느끼는 거부감과 사랑의 복합적인 감정을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픽션은 늘 끔찍한 결함을 안고서 탄생한다. 당신의 모든 희망에 대한 배신이라 할 만큼 추악하다. 완벽한 구상에 대한 잔인하고 역겨운 캐리커처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이해한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로테스크하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은 당신의 것이다. 그 아기는, 그것은 당신이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을 얼러주고, 그것의 축 처진 턱에서 흐르는 뇌척수액을 딱 하나밖에 남지 않은 깨끗한 셔츠의 소맷자락으로 닦아주는데, 깨끗한 셔츠가 하나뿐인 까닭은 당신이 한 삼 주째 빨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 이유는 이 챕터 혹은 이 인물이 드디어 아귀가 맞아들어 제대로 되어갈 아슬아슬한 시점에 놓여 있는 탓에 당신은 그것 말고 다른 데 시간을 쓰기가 겁나기 때문이고, 왜 겁나는가 하면 일 초라도 다른 데를 봤다가는 그것을 영영 놓치고 말아서, 아기 전체가 영영 추악한 상태로 머물고 말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신은 기형의 아기를 사랑하고, 그것을 딱하게 여기고, 그것을 보살핀다. 하지만 또한 당신은 그것을 미워한다. 정말 미워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형이고, 역겹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머리에서 종이로 출산이 이뤄지는 와중에 무언가 그로테스크한 일이 그것에게 벌어졌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결함은 당신의 결함이고(왜인가 하면 만일 당신이 더 나은 픽션 작가였다면 당신의 아기는 당연히 유아복 광고 카탈로그에 나오는 아기들처럼 완벽하고 분홍색이고 뇌척수액도 잘 가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추악하고 지저분한 숨결 하나하나가 모든 차원에서 당신에 대한 참혹한 비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은 그것이 죽었으면 좋겠다. 비록 당신이 그것을 애지중지하고, 사랑하고, 닦아주고, 얼러주고, 그것이 제 자신의 그로테스크함에 숨이 막혀 확 죽어버릴 것 같은 순간에는 그것에게 심폐소생술까지 가하면서도 말이다.

이것은 아주 엉망이고 슬픈 상황이지만, 동시에 다정하고 감동적이고 고결하고 멋있기도 하다. 이것은 말하자면 진정한 관계이다. 그리고 그 기형의 아기는 추악함이 절정에 달한 순간에조차 어쩐지 당신이 당신의 가장 좋은 부분이리라고 여기는 부분들을 건드리고 일깨우는 데가 있다. 당신의 모성적인 부분들, 당신의 어두운 부분들을. 당신은 당신의 아기를 무척 사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기형의 아기가 세상으로 나갈 때가 되었을 때, 남들도 그것을 사랑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니 당신은 약간 진퇴양난의 처지에 처해 있다. 당신은 아기를 사랑하고 남들도 그것을 사랑하기를 바라지만, 그렇다면 그것은 곧 남들이 그것을 정확하게 봐주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당신은 말하자면 사람들을 좀 속이고 싶다. 당신이 내심 완벽함의 배신이라고 여기는 것을 남들은 완벽하다고 봐주길 바라는 것이니까.

아니면 당신은 그 사람들을 속이고 싶지 않은지도 모른다. 당신이 바라는 것은 그들이 사랑스럽고, 기적적이고, 완벽하고, 광고할 준비를 싹 갖춘 채 태어난 아기를 목격하고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이 옳고 정확하다고 믿는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완전히 틀렸기를 바란다. 알고 보니 기형의 아기의 추악함은 당신 자신의 괴이한 망상이나 환각에 불과한 것이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렇다면 곧 당신이 미쳤다는 얘기가 된다. 당신은 그동안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남들이 당신에게 설득하는) 것을 보고, 그것에게 스토킹을 당하고, 그 추악한 기형성에 움찔했다는 게 된다. 당신이 적잖이 모자란 사람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사실은 그보다 더 나쁘다. 그것은 또한 당신이 스스로 만든 (그리고 사랑한) 것에서, 자신이 낳은 것에서, 틀림없이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 자신인 것에서 추악함을 보고 경멸했다는 뜻이 되니까. 그리고 이 최후의 최선의 희망, 이것은 그저 당신이 아주 형편없는 부모라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쁜 의미가 있다. 이것은 끔찍한 자기 공격, 거의 자기 고문일지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자신이 완전히, 정신 나간 사람처럼, 자살하는 사람처럼 틀렸으면 하는 것이.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여전히 대단히 재미있는 일이다. 재미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니, 오해하지 말라. 그리고 그 재미의 속성에 관해서라면, 나는 내가 소화전만 했을 때 주일학교에서 들었던 좀 이상한 이야기 하나를 줄곧 잊지 않고 있다. 중국이라나 한국이라나 아무튼 그런 데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산이 많은 어느 시골 마을에 외동아들과 애지중지하는 말 한 필과 함께 농사를 짓는 늙은 농부가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애지중지하는 대상일 뿐 아니라 노동집약적 농사일에도 꼭 필요한 존재였던 말이 마굿간인가 뭔가의 잠금쇠를 풀고 산으로 내뺐다. 늙은 농부의 친구들이 모두 몰려와서 이 무슨 낭패인가 하고 한탄했다. 농부는 어깨를 으쓱 하며 이렇게 말할 따름이었다. “행운인지 불운인지 누가 알겠소?” 며칠 뒤, 애지중지하던 말이 값을 따질 수 없을 만큼 귀한 야생마들을 잔뜩 몰고서 산에서 돌아왔고, 농부의 친구들은 다시 모두 몰려와서 말이 도망친 일이 알고 보니 행운이었다니 얼마나 기쁘냐고 축하했다. “행운인지 불운인지 누가 알겠소?” 농부는 이번에도 어깨를 으쓱 하며 답할 뿐이었다. 이쯤 되면 옛 중국 농부라기보다는 너무 유대인스러운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어쨌든 내가 기억하는 이야기가 그렇다. 그래서 이제 농부와 아들은 야생마들을 길들이기 시작했는데, 그 중 한 말이 등에 타고 있던 아들을 워낙 거칠게 내팽개치는 바람에 아들의 다리가 부러졌다. 그러자 친구들은 몰려와서 농부를 위로하며 그 몹쓸 야생마들이 대체 무슨 불운을 가져온 것인가 하고 한탄했다. 늙은 농부는 어깨를 으쓱 하며 말할 뿐이었다. “행운인지 불운인지 누가 알겠소?” 며칠 뒤, 중국인지 한국인지 아무튼 그런 나라의 왕의 군대가 마을로 찾아와서, 어디선가 벌어질 찰나인 모종의 끔찍한 피투성이 전투를 위해서 열 살에서 예순 살 사이의 신체 건강한 남자들을 모두 징집해갔다. 그러나 그들은 아들의 부러진 다리를 보고는, 말하자면 봉건시대의 병역면제등급 같은 것을 그에게 적용하여, 억지로 끌고가는 대신 늙은 농부와 함께 남겨두었다. 행운일까? 불운일까?

이 우화는 작가로서 당신이 재미의 문제와 씨름할 때 붙잡는 지푸라기 같은 것이다. 맨 처음, 당신이 처음 픽션을 쓰기 시작할 때, 그 일은 전적으로 재미일 뿐이다. 당신은 딴 사람이 그것을 읽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당신은 거의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떨쳐내기 위해서 글을 쓴다. 당신의 환상과 괴상한 논리를 현실화하기 위해서,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자신의 면모로부터 벗어나거나 그것을 변형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정말 그런 일은 가능하고, 그게 가능할 때 글쓰기는 엄청나게 재미있다. 그런데 만일 당신에게 행운이 찾아와서 사람들이 당신의 글을 좋아하는 것 같다면, 그리고 당신이 정말로 그 글로 돈을 벌게 된다면, 그리고 그 글이 전문가의 솜씨로 조판되고 제본되고 광고되고 리뷰되고 심지어 (한 번쯤) 아침 지하철에서 당신이 전혀 모르는 웬 예쁜 여자애가 그것을 읽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면, 글쓰기는 전보다 좀더 재미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동안은. 그러다가 상황이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하는데, 더군다나 무섭기까지 하다. 이제 당신은 당신이 남들을 위해서 글을 쓴다고 느낀다. 꼭 그렇진 않더라도 최소한 그러고 싶다. 당신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쓰지 않는다. 이것은 – 모든 자위 행위는 외롭고 공허한 것인 만큼 – 아마도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제 무엇이 자위의 동기를 대신할까? 당신은 남들이 당신의 글을 좋아해주는 게 아주 즐겁다는 걸 알게 되었고, 남들이 당신이 쓰는 새 글을 좋아해줬으면 하고 몹시 간절하게 바란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순수한 개인적 재미라는 동기는 남들의 호감을 받고 싶다는 동기, 당신이 알지도 못하는 낯설고 예쁜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에게 감탄하고 당신이 좋은 작가라고 생각해줬으면 하는 동기로 대체되었다. 자위가 아니라 이제 유혹에의 시도가 동기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유혹에의 시도란 어려운 일이고, 재미는 거절에 대한 끔찍한 두려움으로 상쇄되어 버린다. “자아”가 정확히 무슨 뜻이든, 이제 당신의 자아가 게임에 끼어들어 버렸다. 혹은 “허영”이라고 해야 더 나은 표현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제 당신의 글이 대체로 보여주기에 불과하다는 것,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이 훌륭하다고 생각하게끔 만들려는 노력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이해할 만한 일이다. 당신은 이제 글쓰기에 자기 자신을 아주 많이 걸게 되었다. 이 일에는 이제 당신의 허영이 걸려 있다. 당신은 픽션 쓰기의 까다로운 점 하나를 발견한 셈이다. 애초에 이 일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허영이 꼭 필요하다는 것, 그러나 그 어느 정도를 조금이라도 넘어선 허영은 치명적이라는 것. 이 시점에서 당신이 쓰는 글의 90퍼센트 이상은 남들이 좋아해줬으면 좋겠다는 욕구가 압도적인 동기가 되어 씌어지고, 그 욕구를 잔뜩 담아내게 된다. 그 결과 그것은 허섭쓰레기 픽션이 된다. 그리고 허섭쓰레기 작품은 쓰레기통으로 가야 한다. 예술적 진실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허섭쓰레기 작품을 내놓으면 사람들이 당신을 싫어할 테니까. 작가적 재미의 진화 과정에서 이 시점이 되면, 이전에 늘 당신의 글쓰기를 자극하는 동기였던 것이 이제 당신의 글을 쓰레기통에 처박게 만드는 동기로도 작용한다. 이것은 역설이고, 일종의 이중 구속이며, 이 때문에 당신은 몇 달 심지어 몇 년씩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을 수도 있다. 그동안 당신은 울부짖고, 이를 악물고, 불운을 한탄하며, 이 일의 재미는 죄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하고 씁쓸해한다.

이 대목에서 잘난 척을 해보자면, 이 구속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어떻게든 당신의 원래의 동기로, 즉 재미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재미로 돌아가는 길을 찾았다면, 당신은 지난 허영의 시기에 겪었던 추악하고 불운한 이중 구속이 알고 보면 사실 당신에게 행운이었음을 깨달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되찾은 재미는 허영과 두려움의 불쾌함을 거치면서 변형된 것이고, 당신은 이제 그 불쾌함을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기에 다시 발견한 재미는 이전보다 훨씬 더 충만하고 훨씬 더 속깊은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재미는 이제 말하자면 놀이로서의 일이다. 혹은 규율 잡힌 재미가 충동적인 재미나 쾌락적인 재미보다 좀더 재미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혹은 모든 역설이 우리를 마비시키진 않는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재미가 새롭게 관장하게 되었을 때, 픽션 쓰기는 이제 당신 자신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당신이 보고 싶지 않은 것, 혹은 남이 아무도 보지 말았으면 하는 것을 조명하는 일이 된다. 그리고(역설적으로) 바로 그런 소재야말로 보통 모든 작가들과 독자들이 공유하고 반응하는 것, 느끼는 것이다. 픽션은 이제 당신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방편도 아니고, 당신이 생각하기에 남들이 당신을 가장 많이 좋아해줄 것이라고 여기는 방식으로 자신을 선보이는 방편도 아니며, 그 대신 기묘한 방식으로 당신 자신을 지지하는 방편이 된다. 이 과정은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무섭다. 또한 고되다. 그러나 알고 보면 최고의 재미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당신이 처음에 글쓰기를 통해서 벗어나고 싶었거나 가장하고 싶었던 당신의 부분들, 바로 그 재미없는 부분들을 직면함으로써 당신이 이제 글쓰기의 재미를 지속할 수 있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역설이다. 그러나 이 역설은 어떤 종류의 구속도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선물이고, 일종의 기적이다. 이것에 비한다면, 낯선 사람들의 애정이라는 보상은 한낱 먼지에, 보푸라기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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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oughts on “The Nature of the Fun – David Foster Wallace

  1. 번역 너무너무 감사드려요. 인상깊게 읽고 갑니다ㅠㅠㅠㅠ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픽션이 우리나라에 출간되기를 다시 한번 소원해봅니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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