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er Schreier – One of us

전성기의 페터 슈라이어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름이었다. 동독식으로 표현하자면, 그는 우리의 공공재였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 만큼은 이 말이 진정 긍정적인 의미였다. 왜냐하면 페터 슈라이어에게는 우리 “노동자와 농민의 국가”가 자랑했던 다른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갖지 못했던 – 하물며 베를린 장벽 너머의 예술가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 특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친근함이었다.

내가 페터 슈라이어라는 이름에서 맨 먼저 떠올리는 것은 그의 훌륭한 모차르트와 슈베르트 연주가 아니다. 대신 내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1960년대 중순에서 말까지 드레스덴 코타 지역에 있었던 우리 할머니 집의 작고 어두운 거실이다. 그 방 한구석 난로 옆에는 꼬마였던 내가 할머니 옆에 찰싹 붙어 함께 앉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한 낡은 윙체어가 있었다. 그 집의 유일한 텔레비전도 그 방에 있었다. 요즘 아이들이 보면 텔레비전인 줄도 모를 그 물건은 아담한 나무 상자 한가운데에 타원형 화면이 박혀 있는 것으로, 옅은 회색에서 짙은 회색까지 다채로운 색상을 자랑했다. 그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채널은 단 하나, 동독 국영 방송국 채널이었다. 텔레비전은 방송이 시작되는 때부터 저녁이 되어 점검 화면이 뜰 때까지 하루 종일 켜져 있었지만, 어언 오십 년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 내가 선명하게 기억하는 장면은 두 가지뿐이다. 가뷔 자이페르트의 모습(십대 아이스스케이팅 선수였던 그녀는 뛰어난 연기를 보여야 한다는 압박에 엄청나게 시달렸기에, 그 모습을 보는 나야말로 도망치고 싶었다), 그리고 상냥하면서도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목소리로 “다인 이스트 마인 헤르츠”[슈베르트의 연가곡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중 7곡 ‘초조한 마음’]을 부르던 페터 슈라이어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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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이 그의 이름을 말할 때, 그 목소리에는 늘 존경이 어려 있었다. 마치 작지만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의 대좌 위에 그를 앉히듯이, 어른들은 그 이름을 발음하기 전에 잠깐 말을 멎곤 했다. 그 이름의 한 음절 한 음절을 강조해서 발음하곤 했다. 그것은 우리 “현실사회주의 국가”에 넘쳐나던 여느 영웅들을 기리는 방식과는 전혀 달랐다. 전혀. 그것은 솔직한 진심이 담긴 존중이었다. 왜냐하면 페터 슈라이어는 늘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노래하는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여러 특권을 누린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는 그런 것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다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어린 꼬마였던 나는 클래식을 전혀 몰랐다. 바흐, 모차르트, 슈베르트 같은 이름들은 낯설었다. 오페라 아리아와 가곡은 어렵게만 느껴졌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나는 독일 슐라거라고 불리던 록이나 팝 음악도 그다지 많이 듣지 않았고, 재즈는 더욱더 몰랐다. 그러나 페터 슈라이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는 할머니의 흑백 텔레비전에 자주 나타났고, 그러면서 서서히 우리 가족 중 하나가 되었다. 그가 노래할 때면, 그와 우리 사이에 놓인 화면이 스르륵 사라지는 것 같았다. 우리 어머니는 천국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고, 슈라이어는 우리 거실 한가운데에서 노래하는 것 같았다. 그는 텔레비전에 자주 출연했지만, 그래도 그가 출연하는 장면은 매번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토록 아름답게 노래하는 그 사람은 어디 높은 곳에서 지상의 우리들에게 내려온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거기, 우리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는 예술을 대할 때의 겸손한 태도를 청중에게도 보여주는 드문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고급 예술의 다른 대변인들보다 그의 이름이 우리 꼬마들에게 더 외우기 쉬웠던 탓도 있었지만, 결코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노래하는 방식은 우리에게 무언가 호소하는 데가 있었다. 우리는 그를 더없이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노래를 해야만 해서, 혹은 노래할 자리라서 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노래하고 싶어서 노래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가 노래하고 싶어 했기에, 우리는 그를 듣고 싶어 했다. 그는 우리에게 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에게서는 모든 멜로디가 이야기가 되었다. 그것은 그만의 이야기, 바로 그 순간 그만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는 젊은이도 늙은이도, 클래식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그 장르의 팬이 아닌 사람들도 다들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동독 시민들의 따분한 일상에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을 안겨주었으며, 그것도 우리 중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 그렇게 했다.

우리가 이 유명한 테너 못지않게 동독과 동일시했던 다른 많은 명사들이 – 배우들, 작가들, 과학자들, 스포츠 선수들, 록 스타들이 – 훗날 서방으로 넘어갔을 때도, 페터 슈라이어는 고국에 남았다. 국가가 아니라 고향에 남았다. 그것은 큰 차이였으나, 오늘날 사람들이 동독을 돌아볼 때 종종 잊곤 하는 점이다.

물론 세상에는 바흐와 모차르트를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에, 페터 슈라이어는 동독을 벗어난 세계에서도 스타가 될 수 있었고 “바깥에서도” (즉 “자유 세계”에서도)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공연을 하고 다녔다. 그러나 그는 늘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정치적 꼭두각시의 분위기를 풍긴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국가의 통제를 받는 기성 예술계의 일원인 적도 한 번도 없었다. 비록 그가 일부러 의도한 일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는 창조적인 틈새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보여준 예시와도 같았다. 오로지 노래와 청중에게 헌신했던 그는 온 세계에 속하는 예술가였지만, – 그리고 늦어도 1980년대가 되면 우리 동독 시민들도 온 세계가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 그럼에도 그는 무엇보다 우리들의 예술가였다. 그의 음악을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 나 또한 자라면서 다른 음악 형식들에 더 끌리게 되었지만 – 우리에게 그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페터 슈라이어는 그냥 노래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에게 뭔가 의미있는 것을 노래하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가 늘 청중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더없이 잘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긴 세월이 흐른 뒤 지금 페터 슈라이어를 들으면, 마치 과거의 나 자신을 다시 만나는 것만 같다. 정치적 문제 따위는 까맣게 모른 채 그저 그의 목소리에 감동하고 위안받던 시절의 나를. 장벽은 무너졌고, 시절은 변했으며, 국기도 달라졌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페터 슈라이어는 내내 스스로에게 진실했다. 그것도 감동적인 방식으로. 이제 그는 더 이상 노래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 다리와 같은 존재이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다리일뿐 아니라, 그간의 모든 정치 체제를 넘어서 과거와 미래를 잇는 다리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언제까지나 “우리 중 한 사람”일 것이다. 고맙게도 이제 그 “우리”에는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포함되지만 말이다.

-볼프 캄프만 (독일 음악 평론가)

 

***
삽입된 사진은 이 글과는 무관한 것이지만, 보는 순간 이 글이 그리는 풍경이 바로 저것임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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